애송이 같은 생각이었다. 수능이 끝나도 수험생으로 해야 할 일들은 남아있었다. 주말마다 논술 시험을 보러다녀야 했고, 정시 지원에 대한 전략을 짜기 위해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학과들을 알아봐야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전공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고, 내가 지원하고 싶은 학과와 내가 지원할 수 있는 학과의 교집합이 생각보다 작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 나의 눈을 사로잡은 학과가 있었다. 바로‘연극영화과’였다.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영화를 보는 것, 극장에 가는 걸 정말 좋아했었다. 그때는 아직 극장에 영화 팜플렛이 비치되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집 앞 멀티플랙스 극장에 들러 새로나온 팜플렛들을 한장씩 챙겨와 파일에 따로 정리를 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쓸데없는 공상에 빠질때마다 떠오르는 스토리를 참고서나 교과서 귀퉁이에 적어두었다가 나만의 스토리 박스에 차곡차곡 쌓아두기도 했었다.
그래서였다. ‘연극영화과’라는 단어는 내가 가슴에만 막연하게 품고있던 심지에 불을 붙여놓았다.
그때 새겼던 과잠의 문구는 인생역전이었다
며칠 후, 논술고사가 모두 끝난 것을 축하하며 모인 가족식사 자리에서 나는 또 다시 선언을 했다.
“나 영화 감독이 될거야”
평생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고 모범생으로 살아왔던 큰 딸의 폭탄선언에, 부모님은 포크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자신감도 있었다. 연극영화과는 내가 지원해볼 수 있으면서, 또 내가 지원하고 싶은 교집합에 놓인 몇 안되는 선택지였다.
그러나 이미 영화인으로서의 나를 꿈꾸던 시점에서, 나는 예상치 못한 물길을 만나게 된다.
‘수시 합격’
한 장짜리 합격증에는 내가 그토록 바라왔던 대학교의 로고가 박혀있었다. 나는 사회가 모두 인정하고 부러워하는 명문대 학생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영화감독이라는 꿈은 새봄을 맞이한 눈처럼 금새 녹아없어져버리고 말았다.
커다란 알파벳을 가슴팍에 달고, 손목에는 ‘인생 역전’이라고 쓴 과잠을 입고 나는 새로운 도시를 누볐다. 찬란한 스무살의 시작이었다.
더이상 미래를 위해 현재를 죽이고 살고 싶지 않았다. 인생이 지금 시작된 것처럼 즐기고 싶었다. 케이블 방송국의 전성시대가 열렸던만큼 세상은 젊은이들에게 돈을 쓰기를 바라고 있었고, 나에게는 과외비가 있었다.
테이스티로드, 수요미식회, 겟잇뷰티. 집 앞 동네를 벗어나자 새로운 음식과 놀거리들이 가득한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0cm의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라는 노래처럼 나는 홍대, 상수, 신촌, 이대, 이태원을 쏘다녔다.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나의 시간을 그렇게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물론 대학생활을 방탕하게 보냈던 것은 아니었다. 수업도 열심히 들었고, 동아리 활동도 교우관계도 과외에 교환학생까지 대학생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활동들에 열심히 참여를 했었다.내가 유일하게 간과했던 것은 취업이었다.
그때의 나는 의기양양했다. 스무살 이후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단순한 계산법이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한 노력으로 나는 평생 손쉽게 내 인생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미래 역시 어떻게든 될 줄 알았다.
나는 계획한 것은 이뤄내는 사람이었고, 사람들은 나를 좋아했다. 그리고 인생에 행운 역시 적절히 나를 따라준다고 믿었다.
때문에 나에게 일이란, 애써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운명과도 같은거라고 생각했다. 마치 내가 나의 대학과 전공을 만난 것처럼, 우연히 시작하게 되는 로멘틱한 인연처럼 진로 역시 그런거라고 믿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