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인상

ep3 협상가 지대리5

by 밀크씨슬

그래도 지대리가 명분은 줬다. '직원들이 정말 너무 궁금해해서 인상여부만 알려주고 싶다.' 정도로 이야기하면 될 것이다.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부담이 된다. 연말연시는 진급,급여,상여라는 이벤트가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임원이 재계약이 될지 여부를 기다리는 무서운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수십 년간 다닌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내쳐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래도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는 것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임원쯤 되면 급여인상이 그리 달갑지만도 않다. 많이 오른 만큼 세금도 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표는 그걸로 더욱 생색을 낼 것이다. 대표는 일반 직원들에게는 참 친절하다. 그러나 임원들한테는 일반 직원들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그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그리 알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임원이란 대표의 손과 발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마구 사용해도 되는 연장쯤 되지 않을까 심상무는 생각한다. 이번에 급여인상이 되지 않더라도 대표는 절대 자기 입으로 밝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말하기 불편한 이야기는 보통 심상무 같은 임원에게 떠넘기기 때문이다. 대표는 우상과 같다. 우상은 절대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우상화된 인간이 있다면 그 위엄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게 임원이 아닐까 심상무는 생각했다.


그리고 심상무는 이런 역할에 나름 자신이 있다. 심상무의 특기는 회사가 정한 방향을 직원들이 알아듣도록 설명하고 잘 다독이는 것이다. 그는 대표의 '나쁜 입'이다. 그리고 수십 년간의 경험으로 어떤 직원에겐 어떤 말을 해야 되는지 정말 잘 알고 있다. 한 회사를 수십 년 다니게 되면 따로 배우지 않아도 인간에 대한 통찰이 생기는 거다.


그런데 이번엔 직원들의 소망을 대표에게 잘 알아듣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같은 대화이지만 직원들을 설득하는 것과 대표를 설득하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다. 사실 대표를 설득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대표는 임원들이 의견을 내거나 질문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예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대표가 좋아하는 두가지 문장이 있다. 바로 '생각 없이 말하지 말라.'와 '의견이 정말 하나도 없나?'이 두 가지다. 이 모순적인 두 문장은 대표가 각각 상황에 맞게 임원들을 요리하도록 돕는 주방 집기와 같다. 이번엔 대표가 '생각 없이 말하지 말라'를 사용할 차례이다. 그때 딱 써먹을 만한 게 바로 명분이다. '직원들이...'로 시작하는 말은 최고의 명분이다. 결코 심상무의 사심에서 나온 질문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다.


쉐도우 파이팅을 수십번은 했다. 시뮬레이션을 너무 여러 번 해서 이미 대표와 밥을 다 먹은 느낌이 든다. 그때쯤 대표의 전화가 걸려온다. 항상 그렇듯 17시 30분. 거의 1분의 오차도 없이 대표는 매일 이 시간에 저녁을 먹는다. 심상무는 저녁과 함께 잔소리도 먹는다. 임원의 숙명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심상무도 해야 할 말이 있다. 나름 각오를 하고 대표와 함께 식당으로 향한다.


그리고 2월분 급여부터 모든 직원들에게 약 5%의 상승된 임금이 지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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