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 반달이 되는 눈,그 눈 옆으로 지는 주름은 선한 인상을 주었다. 그의 밝고 순한미소가 순수해 나를 설레게 했다. 그가 웃으면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리는 젊음이 재산이고 젊음으로 눈이 부시던 나이. 젊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데이트를 할 때마다 우리 주머니에 지갑은 늘 가벼웠지만, 그의 주머니에는 군밤이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주머니에 내 손을 포개어 넣으면 달그락달그락 군밤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하나씩 까서 내게 주었다. 까주는 군밤 먹는 재미에 걷는 길이 즐거웠다. 나중에는 그의 주머니가 군밤 껍질 부스러기로 가득 차도 그는 늘 괜찮다며 소복이 웃었다. 좋으면 좋아서 웃고, 불편한 것도 괜찮다고 웃는 그의 넉넉한 미소가 참 좋았다.
그해 겨울은 코 끝은 시리고, 귀 끝은 떨어져 나갈 듯이 아렸다. 너무 추워,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잠을 자는 듯 고요했다. 해도 게을러지는 듯, 아침은 조금 늦게 왔고, 밤은 조금 일찍 왔다. 잿빛 세상 속에서 알록달록 무지개 빛을 발하던 거리의 크리스마스트리.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채도가 다른 초록물결이 넘실대고, 가을색은 깊어가을빛에 눈이 부신데, 겨울은 색이 없어 크리스마스 트리에 색을 밝혀 장식하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어떤 계절도 색이 없는 계절이 없었고, 희망을 꿈꾸지 않는 시간이 없었다.
그 해 우리는 두 번째 크리스마스를 함께 맞았다. 크리스마스였지만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특별할 것이 없는 데이트였다. 1인분에 3,900 원하는 삼겹살을 먹고 길거리 포장마차 분식집에 들러 오뎅을 하나씩 먹고, 덤으로 주는 오뎅국물을 종이컵에 담아 테이크아웃(?)을 하여 한 손으로는 오뎅국물이 든 종이컵을 들고, 한 손으로는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한 손은 오뎅국물이 든 컵을 들고 있어서, 다른 손은 우리가 맞잡아서, 양손이 훈훈하게 뎁혀졌다. 그 손의 온도로 그해 겨울이 따스했다.
항상 데이트의 마지막은 그가 나를 데려다주면서, 우리 집까지 걸어가기. 걸으면서 대로변의 자동차 경적소리, 오토바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우리 뒤로 배경이 멈춘 듯했다. 분명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은 것 같은데 어떤 선물을 주고받았는지 감실감실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걸어오는 길에서 그가 주었던 크리스마스 카드와 그가 했던 말들은 또릿또릿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멜로디 카드를 샀어. 열어봐~”
두근두근 그가 건넨, 빨간 봉투를 조심스레 뜯었다.
“어? 멜로디카드가 아닌데? 이거 일반카드잖아~”
“열어봐~ 카드를 열어 봐 야지.”
보석함의 뚜껑을 열듯, 살며시 열어보니, 그가 볼펜으로 그린 동그라미 두 개. 반듯하지 않아 원은 아니고, 삐뚤빼뚤한 동그라미. 초등학생 이후 글씨체가 늘지 않았다더니, 초등학생이 쓴 것 같은 글씨체가 보였다. <동그라미를 눌러보아요>
나는 “띡~” 버튼음 소리를 내며 그가 그린 동그라미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동그라미 버튼을 누르자 그가 “흠흠~” 목을 가다듬더니 불러주는 크리스마스 캐럴.
“꿈~속에 보는 화이트~크리스마스~
올~해도 다시~ 돌아와~~~”
그가 부끄러운 듯 부르는 캐럴 소리를 끝까지 들으며, 맞잡은 그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이 사람은 500원짜리 카드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으로 만들 줄 아는구나.’ 그때 처음 알았다.
평범한것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돈으로 되는게 아니라는 것을.
그 시간이 너무 아름다워서 기억이 빚어낸 환상이었는지, 꼭 잡은 손 위로 엷은 싸락눈이 흩날렸던 것 같다.
그와 결혼 한지 11년이 되었다. 더 이상 주머니의 군밤으로는 행복할 수 없는 건가. 남편의 외벌이로 아이 학원비, 대출이자를 내고, 여행도 다녀야 하고, 가끔 외식도 하다 보면 저축하기에는 빠듯한 생활비.
아이로 인해 알게 된 지인들 중에서, 다들 결혼한 시기가 비슷해 이제는 가전제품을, 집 인테리어를, 차를 바꾸는 집이 많아졌다. 식기세척기에로봇청소기등 가전제품도 늘었다.지인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돌아와, 우리 집을 둘러보니 우리 집 냉장고, 세탁기는 나의 결혼기간 동안 함께했다.
장롱은 2번의 이사를 겪은 후 문짝을 고정해 주던 나사 하나가 빠져 달아나서 문을 열 때마다 나뭇가지 끝에 걸린 나뭇잎처럼 아슬아슬 덜렁 됐다. 소파도 탈피를 하나? 소파 가죽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집안 물건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들.‘아~ 우리도 조금씩 바꿀 때가 됐구나.’
목돈이 들어가는 일에 나는 바람빠진 풍선처럼 마음이 쪼그라든다. 아이는 커가고, 돈 들 일은 많으니 한숨이 나왔다. 마음에 바람이 불었다.
최근에 아이의 작아진 옷을 정리하다가 연애할 때 남편과 주고받았던 편지와 사진들을 담아둔 상자를 발견했다. 열어보니 고이 간직되어 있던 그날의 크리스마스 카드. 그 카드를 다시 열어보았다. 오뎅국물 하나에 그해 겨울은 온통 따스했고 , 그가 불러 준 캐럴 크리스마스 카드에 "돈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절대 돈으로 할 수 없다"라고 믿으면서 돈에 휘둘릴 것 같지 않던 그날의 내가 떠올랐다. 그래서 남편과 결혼을 결심했던 시간들도.
돈이 없었어도 우리는 행복했는데...
그 카드를 다시 열어 본 날, 우리 집 대청소를 했다. 냉장고를 닦았다. "나의 반려가전 냉장고야 고맙다, 한 번도 고장 나지 않고, 잘 버텨줘서." 장롱 문짝도 닦았다. "고맙다, 반려가구야~ 떨어지지 않고 한쪽으로도 잘 버텨줘서.""고맙다, 소파야. 가죽은 벗겨졌을지 언정, 누워있기에 너의 쿠션감은 아직도 최고 거든.""반려"라는 말을 붙여가며 '고생했다' 쓰다듬듯 닦으니 그 물건들에 애정이 솓았다. 고르고, 사면서 함께 한 우리의 시간들이 물건들에 깃들어 있었다.
점점 더 커지는 거대한 소비문화에 내가 대항할 수 있는 힘은 없다. 다만 돈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그러려면 내 삶의 디테일을 가꾸는 것밖에는 없다.
돈으로 비교하고 견주고 초라해지는 것이 아닌 소소한 기쁨을 찾아 내 삶에 만족하는 방식을 만들 수 밖에는.
ㆍ오늘 저녁 김치찌개를 끓여 소박한 일상의 대화가 오가는 즐거운 저녁식탁 만들기. . 설거지하는 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음악 듣는 시간. 설거지 할때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자! . 가을바람을 즐기며 산책하기. . 그 길에 동네 책방에 들러 맘에 드는 책 한 권 사기 ㆍ벽 한편에 붙이는 그림엽서 가을배경 엽서로 바꿔 붙이기. ㆍ집안 곳곳에 좋아하는 그림책 전시하기.
소소한 나의 기쁨 목록을 써서 깨끗이 닦은 냉장고 문에 붙이며 그 옆에 20대의 남편에게 받았던 크리스마스 카드를 붙였다. 돈 때문에 마음에 바람이 불면, 그날의 나를 떠올리리라 생각하면서.
제 글이 물건에 관한것이었는데요. 이 글을 쓰고나서, 물건에 관한 그림책을 많이 찾아 보는 시간이었던것 같아요.
저는 연애시절 남편에게 받았던, 카드를 지금도 보면 뭉클해요. 돈에 휘둘리지 않고, 돈으로 사람 판단하지 말고, 겸손하게 소박한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요... 글의 소재였던 "물건"에 대한 시각을 확장해서 그림책을 보니 수집하는 물건, 애착물건, 유품, 받았던 특별한 선물, 저처럼 추억이 깃든 물건, 내 인생을 함께 한 물건 등 다양한 것들이 찾아지더라고요.
이 책은 책을 너무 좋아해서 집안 가득, 책으로 가득 차자, 자신의 책들을 기증해 도서관을 세운 '엘리자베스'이야기예요.
아마 책을 좋아해서 책을 사서 보시는 분들께는 꽤공감할만한 내용의 그림책일것 같은데요. 저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도 하지만 사는 것도 좋아해서 이 그림책을 좋아해요. 너무 공감하니까요. 책을 좋아하는'엘리자베스'의 모습들이 어쩐지 친근하기도 하고요.
저는 특히 그림책을 참 많이 사거든요. 좋아하는 작가님 책이라 사고, 좋아서 사고, 표지 예뻐서 사고, 리커버 돼서 산 책 또 사는 거 보면 소비문화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나 봅니다.
이 그림책의 글작가인 '사라 스튜어트'와 그림작가인 '데이비드 스몰'은 부부예요. 그림도 글도 참 좋아하는 책이다보니, 부부의 정서가
닮아있다는 것도 부럽게 다가왔던것 같아요.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도 있고, 사서 보는데도 큰돈이 들지 않으니 소소한 행복을 찾고 내 인생을 가꾸는 좋은 물건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