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쓰레기장 한쪽에
납작 눌린 머리와 둥근 몸집으로
훈기를 품어내던 그가 있다
어디가 말썽인지 배를 훤히 드러내놓고
어제 내린 눈을 고스란히 맞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다
한때 그
낭랑한 알림음과 고운 목소리로
맡은 일의 시작과 끝을 빈틈없이 알리며
때론 사람을 놀라게도 하고
때론 웃음을 자아내게 하지 않았던가
갖가지 재료들을
너른 품에서 살뜰히 익혀내
누군가의 헛헛한 속을
따뜻한 온기로 채워주고
누군가의 아침잠을 지켜주기 위해
밤새 조용히 움직이던 그
음식으로 건네는 부드러운 포옹에
나도 자주 속을 맡긴 적 있다
드러난 배가 못내 시려 보여
옷깃을 여며 줘도
다시 벌어지는 몸
무엇이든 뜨겁게 품어내던
그의 속은
이제 쓸쓸한 냉기만 떠돈다
사위어 버린 온기에
찬밥 신세가 되어버린 그
따뜻한 밥의 대명사였던 그의 아늑한 품을
누군가는 떠올리려나
* 길상호 시인의 <어떤 노숙자>라는 시를 모방해서 쓴 시입니다.
그의 시를 읽고 버려진, 뚜껑조차 닫히지 않던 전기압력밥솥이 떠올라 써봤습니다.
그의 시에는 네모난 텔레비젼이 등장합니다.
이 설명을 읽기 전에 시만으로 밥솥을 떠올린 분이 혹시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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