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엄마 은행 가서 돈 찾는 거 가르쳐 줘야겠다" 아빠는 첫 항암치료를 받기 전 내게 말했다. 엄마는 글을 잘 모른다. 엄마가 4살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른도 안 된 나이에 홀로 된 외할머니는 혼자 힘으로 세 남매를 키워야 했다. 아들인 외삼촌은 초등학교를 보내 공부를 시켰지만 엄마는 일만 시키고 못 배우게 했다며, 엄마는 외할머니를 향한 미움을 간혹 내비치기도 했다.
아빠는 종이에 글씨를 쓰고 엄마에게 따라 써보라며 건넸다. 엄마는 글씨를 읽으며 천천히 따라 썼다. "일십만 원, 일백만 원, 오십만 원, 칠십만 원......." 그러다가 엄마는 자신이 우스웠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도 필체가 좋구먼. 아빠만 잘 쓰는 게 아니었네. 엄마가 글씨를 안 써봐서 그렇지 잘 쓰는 글씨야." 엄마가 글씨 쓰는 게 귀엽게 느껴진 나는 그렇게 엄마를 추켜 세웠다.
나는 엄마가 까막눈인 줄 알았었다. 그러다가 집으로 온 청첩장 같은 걸 떠듬떠듬 읽는 엄마를 보고 잘 읽는다며 엄마를 칭찬하면서 기뻐했다. 언젠가 보험 계약을 할 때 엄마가 글씨 쓰는 걸 처음 보고 '김영숙'이라고 엄마 이름을 쓰는 게 신기해서 사진으로 찍어 두기도 했다.
은행 볼일이나 엄마의 보험 계약 등 만약을 대비해 아빠는 하나하나 알려주고 계신다. 아빠 그늘에서 살아오던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엄마도 마음속으로는 준비를 하는 걸까? 엄마는 아빠가 해준 얘기를 잊어버린다며 잘 기억하고 있으라고 내게도 얘기해 준다. 그래서 부모님 몰래 나는 자주 훌쩍인다.
부모님 계실 때 사진이나 영상을 많이 남겨두라는 주변의 말에 내 휴대폰에 엄마, 아빠 사진이 늘어나고 있다. 전화 통화를 하게 되면 녹음 버튼도 누른다. 나중에 엄마가 글을 더 배워서 아빠에게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고 읽어줄 수 있다면 그 순간도 사진과 영상으로 꼭 담아야겠다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