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조건

연애는 사랑, 결혼은 신의

by 은섬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에서 나의 시선을 가장 사로잡은 작품은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의 약혼식이다. 약혼(Engagement)으로 표기하기도 하고, 결혼(Marriage 또는 Wedding)으로 표기하기도 하는데 그림 속에서 배우자로 선택받지 못해 실망한 청년이 화풀이로 지팡이(나뭇가지)를 무릎으로 부러트리는 장면이 묘사되어있어 약혼식으로 보는 것이 정황상 맞는 듯하다. 부러트린 지팡이는 배우자를 뽑는 과정에서 신랑 후보자 각자가 제출한 것으로 배우자 선정이 이루어진 직후의 장면임을 알 수 있다.

라파엘로 성모의 약혼식(결혼식) _ 브레라 미술관 홈페이지


성경에서는 마리아와 요셉의 약혼에 대한 이야기는 있지만 결혼식에 대한 것은 없다. 루카 복음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적 등록 칙령에 따라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루카 2,5-6) 아기 예수를 낳을 때까지 마리아와 요셉을 약혼한 사이로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결혼식을 생략하지 않았을까? 당시는 간음한 여자는 군중이 던진 돌에 맞아 죽는 시대였다. 요셉은 결혼 전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조용히 파혼하기로 마음먹지만 천사가 꿈에 나타나 두려워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말한다. 요셉은 너무나 괴로웠을 테다. 나이 든 몸으로 어렵게 배필을 만나 너무나 기뻤는데 그녀는 자신과 함께하기 전에 태중에 아이를 배었다. 요셉이 느꼈을 배신감과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침묵했고, 하늘의 뜻을 조용히 따랐다. 위험 속에서 가족을 지켰고, 땀 흘리는 노동자로 성실히 가족을 부양했으며 양부로서 최선을 다했다.


이렇듯 요셉은 의로운 사람으로 불리는데 요셉이란 이름 자체가 '돕는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겸손과 순명, 성가정의 모범인 요셉은 책임지는 가장의 대명사다. 결혼 생활에서 신의를 지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가 요셉을 통해 구체화된다. 요셉의 모범처럼 부부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과 의리이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없다면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걸을 수 없다. 남보다 못한 가족은 이미 신의가 땅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신의를 저버리고 잃는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회복할 수 있을까?


연애는 사랑이 필요하지만 결혼은 신의다. 라파엘로의 그림 앞에서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혼인에 대한 신의를 잘 드러내고 있는 또 다른 작품이 있는데 파도바 스크로베니 경당에 있는 조토가 그린 성모의 일생이다. 조토의 그림이 위에 소개 한 라파엘로의 그림보다 200년 더 앞서 그려졌다. 빼곡한 벽화 중 마리아의 혼인과 관련된 것은 두 개의 벽화다.


첫 번째는 라파엘로의 그림처럼 약혼식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여기서도 군중들 중에 선택되지 못한 실망감으로 지팡이(나뭇가지)를 무릎으로 부러트리는 청년이 등장한다. 요셉이 들고 있는 지팡이에는 신랑감으로 선택되었다는 의미로 백합꽃이 피어 있고, 성령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내려와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말하고 있다. 신랑감 선택 장면에서도 이와 같은 의미로 제대 위 천장에서 하느님의 손이 내려온다. 마리아와 요셉이 약속의 징표로 반지를 주고받는데 반지가 끼워지는 그 중요한 순간에 마리아의 다른 한 손은 임신 한 배를 감싸 안고 있다.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 예수를 귀하게 받아들여 소중히 지키겠다는 결심을 배를 감싸는 단순한 손동작 하나로 훌륭히 나타냈다.(라파엘로의 그림에서 마리아는 배를 감싸 안고 있지 않다.)


두 번째 그림에서는 마리아의 배가 많이 불러있어 두 그림 사이에 시차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대입해보면 임신 초기 사촌 엘리사벳 집에 석 달간 머물던 마리아가 요셉의 집으로 향하는 장면인 듯하다. 반대로 엘리사벳 집으로 향하는 장면이라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굳이 떠들썩하게 군중과 악사까지 대동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결혼 행렬이란 타이틀로 표기되지만 이 그림에 신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엘리사벳 집에서 요셉이 있는 나자렛으로 입성하는 장면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조토 성모의 일생 _스크로베니 경당


(초산인 경우 대부분 배가 많이 부르지 않고 임신 초기 상황은 더더욱 그러해서, 그림 속 마리아의 불룩한 배는 그림을 보는 이에게 임신한 상황임을 강조하려는 조토의 스토리텔링이다. 조토의 회화가 특별한 이유는 그가 매우 훌륭한 스토리텔러였다는 것이다.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그림 속 이야기에 빠져들어 마치 Live 생중계처럼 현장감 있게 보고 느끼게 하는 그의 강력한 구성력은 정말 독보적이고 최고다. 당시 다른 미술가들과 구별되는 조토만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겠다. 나는 그가 글을 썼었어도 훌륭한 작가가 됐을 거라 생각한다.)


마리아는 예복을 차려입고 길을 인도하는 이들을 따라가는데 군중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어 마리아는 두 손으로 옷자락을 들어 올려 부른 배를 가리고 있고, 맞은편에서는 악사들이 연주를 하며 마리아를 맞이한다. 성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배경이 된 건물에 커다란 나뭇잎을 내걸었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올리브 가지와 같은 의미다. 두 작품 모두 주변인들의 소란 사이에서 정작 주인공의 얼굴은 매우 평온하고 고요하게 묘사되어 있어 요셉이 얼마나 마리아를 존중하고 배려했는지가 물씬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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