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섬 Jul 22. 2023

눈 폭풍 속에서

3월의 크리스마스


순례 21일 30㎞
출발 : 아스토르가 Astorga
도착 : 폰세바돈 Foncebadon

아네트, 루비, 타미라와 함께 우리 넷은 알베르게가 보이는 바에서 빵과 커피로 아침을 먹으며 한 시간째 알베르게 입구를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다. 타미라가 마음에 들어 하는 순례자가 있어서 그가 알베르게에서 나오면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며 연락처를 물어볼 심산이다. 아네트와 나는 타미라를 위해, 기꺼이 그리고 진득하게 기다리며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루비와 타미라의 싱그러운 청춘이 그저 어여쁘고 귀여웠기 때문이다.


중간에 슈퍼마켓에서 비상식량으로 땅콩과 말린 푸룬을 사고, 우의를 잃어버린 아네트는 임시로 간이 판초우의를 샀다. 모닥불이 피워진 중세풍의 가든에서 또르띠야와 커피로 점심을 대신했는데 그랜드 피아노와 도르래 달린 커다란 문과 정원이 멋스러웠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바람이 거세다. 레온산맥에 이르는 오르막길이 점점 거칠어지고 황량해진다. 우박과 비가 섞여 내리는 통에 얼굴이 너무 아파서 길가 티엔다에 들러 티타임을 가졌다. 티엔다는 간단한 먹을거리와 소품들로 조그맣게 차린 가게를 말한다.


비바람이 잦아들지 않고 점점 더 몰아치는 통에 조금 전 구입한 아네트의 판초가 바람에 날리다 못해 마구 찢어지고 난리가 났다. 마침 옆을 지나던 프랑스 아저씨가 돕겠다며 아네트와 배낭을 찢어진 판초로 꽁꽁 묶어버려서 포박당한 꼴이 되어버린 아네트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루비와 타미라는 라바날 델 까미노 Rabanal del Camino 알베르게에서 머물기로 하고 아네트와 나는 다시 길을 걷는다. 우박과 섞여 내리던 비가 고도가 높아질수록 점차 눈으로 바뀌었다. 경사가 급한 산길에 들어서는데 날이 어두워져 앞서가던 아네트가 보이지 않자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든다. 론세스바예스를 향하던 악몽이 떠올라 미친 듯이 속도를 내 뛰다시피 산길을 오르다 보니 바로 7~8미터 앞에 아네트의 뒷모습이 보였다. 숨이 턱까지 차서 아네트를 소리쳐 부르지는 못하고 부지런히 발만 움직여 따라가던 중 언덕을 넘어 내리막 끝에서 감쪽같이 아네트가 사라졌다. 론세스바예스의 기시감이 든다.


산속에서 날이 저물고 우여곡절 끝에 폰세바돈에 있는 Monte Irago에 도착했다. 몸에 눈이 쌓여 나는 눈사람이 되었고 체온으로 눈이 녹았다가 다시 얼기를 반복하면서 딱딱해져서 털어도 어지지가 않는다. 홀딱 젖은 몸으로 좀비처럼 산장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벽난로 앞에 모여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 나를 부축해 벽난로 앞에 앉히고 따듯한 차를 가져와 먹이고 수건으로 닦아주며 난리가 났다. 아네트는 도로변에서 스페인 삼총사를 만나 함께 택시를 타고 이곳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점점 눈이 많이 내리면서 폭설이 되었다. 온통 세상이 하얗다. 내일 길을 출발할 수 있을지, 산장에 고립되는 건 아닌지 창밖을 내다보는데 스페인 삼총사와 눈이 마주쳤다. 웃음이 피식 나며 나는 눈보라 치는 창문 밖을 향해 메리크리스마스~ 손을 흔들었고 갑작스러운 나의 크리스마스 타령에 모두들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자며 음악을 틀고 춤을 추며 흥겨운 파티가 벌어졌다.


호세가 아주 신났다.


순례 22일 28㎞
출발 : 폰세바돈 Foncebadon
도착 : 뽄페라다 Ponferrada

해발 1500m가 넘는 라 크루즈 데 이에로 La Cruz de Hierro로 출발한다. 이미 길은 쌓인 눈에 덮여 까미노 표식을 찾을 수 없고 눈보라도 계속 휘몰아치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순례길로 가는 건 불가능해 도로를 따라간다. 마태오는 눈길에 찍힌 자신의 발자국을 쫓아오면 된다고 우리를 안심시키며 발자국을 막 어지럽게 찍는다. 폰세바돈 산장에서 강아지가 우리를 따라나섰는데 어린 녀석이 앞장서며 길을 안내한다.



만하린으로 가는 길에 La Cruz de Hierro 정상에 올랐다. 나무로 된 돛대 모양의 기둥 위에 놓인 철의 십자가는 프랑스 루트 중 가장 높은 곳으로 순례자들은 십자가 아래에 자신이 여기까지 짊어지고 온 돌을 내려놓는다. 산길을 내려와 고도가 낮아지면서 눈보라가 점점 잦아들었다. 엘 아세보쯤에서는 완전히 눈이 그치고 비가 조금 뿌리는 정도다. 하지만 내리막 경사가 심한 데다 미끄러운 돌밭이라 마을까지 기다시피 내려왔다.

 

다리를 건너 폰페라다다. 이곳은 Castillo del Temple 성채가 있는데 템플기사단이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이다. San Nicolas de Flue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있자 1시간쯤 후에 아네트가 도착했다. 아네트에게 쉬고 있으라고 말하고 미사를 드리러 홀로 길을 나선다. 아직 오른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는 상황인데 등산화를 벗고 일반화를 신으면 발에 힘이 실리지 않아 증상이 더 심하다. 성채 뒤쪽 라 엔시아의 성모 바실리카 Basilica Nuestra Senora de la Encina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드렸다. 영성체 후 마침예식을 하기 전에 신부님께서 손으로 내가 앉은 쪽을 가리키면서 페레그리노~ 블라블라... 말씀하자 사람들이 모두 나를 향해 박수를 친다. 순례자를 환영하고 또 격려하는 박수다. 얼굴이 붉어졌지만 일어서서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따듯한 환대를 받고 발걸음도 가볍게 알베르게도 돌아오니 와우! 마태오와 호세가 멋진 저녁을 차려준다.


에릭이 철의 십자가 아래에 있다. 돌을 내려 놓으며 그는 무슨 기도를 올렸을까?


순례 23일 31㎞
출발 : 뽄페라다 Ponferrada
도착 : 뜨라바델로 Trabadelo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또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몇 개의 마을과 묘지를 지나 길을 계속 갔다. Cacabelos 에는 La Virgen de las Angustias 성당이 있는데 이곳에는 안토니오 성인이 소녀와 함께 카드놀이를 하는 유명한 성상이 보존되어 있다. 거대한 포도밭 사이로 난 농업도로로 접어들어 비야프랑까 델 비에르소 Villafranca del Bierzo까지 들어선다. 이곳 산티아고 성당에는 용서의 문 Puerta de Perdon이 있는데 롬바르디아식으로 지어진 문으로 교황 갈리스도 3세가 교서로 병들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순례를 계속하지 못하는 순례자가 이 문을 통과하면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 것과 동일하다 인정한 곳이다.


비야프랑까 델 비에르소를 벗어나자마자 계곡으로 들어선다. 이 계곡은 도로가 놓여있는데 순례자는 도로 옆 갓길로 된 곳을 걸어가게 된다. 내리는 비에 날이 어둑한 데다가 계곡 사이를 걷는지라 하루종일 더 어둡다. 회색 도로를 따라 걷는 길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꼭 흑백필름을 돌려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도로 왼편으로 보행자 보호대가 있어서 길이 위험하지는 않지만 빗물 고인 길을 차량이 빠르게 지나갈 때는 영락없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물벼락을 뒤집어써야 했다. 뻬레헤 Pereje에서 뜨라바델로 Trabadelo로 향하는 길에 또 다른 스페인 할아버지 그룹을 만났다. 할아버지들이 정말 대단하시다. 식당을 겸하는 사설 알베르게가 가격도 싸고 시설이 좋다. 추위를 견딜 두툼하고 깨끗한 차렵이불이 침대마다 갖추어져 있었다. 그날 밤 아무도 그곳에 머물지 않아 아네트와 단 둘이 오랜만에 편안한 밤이다.



순례 24일 30㎞
출발 : 뜨라바델로 Trabadelo
도착 : 오스삐딸 다 꼰데사 Hospital da Condesa

밤 새 내린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린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젖은 몸을 잠시 말린 뒤 다시 길을 나서는데 비가 더 세차게 내렸다. 베가 데 발까르세 Vega de Valcarcerk까지는 계속 도로를 따라 걷다가 다시 산길이 이어진다. 오 세브레이로로 이어지는 산길이다. 오르막이 끝없이 이어지고, 또 높이 올라갈수록 비가 점점 눈으로 바뀐다. 인적 하나 없지만 오솔길과 큰 도로가 번갈아 나타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작은 오솔길은 쌓인 눈에 길을 찾기 어렵고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지만 힘에 부칠 때쯤 제설차가 눈을 계속 치우는 큰 도로변이 나와 한결 수월했다. 아네트가 영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계곡 하나 건널 만큼 뒤쳐진다. 오 세브레이로 O Cebreiro에 가까이 갈수록 눈보라가 점점 거세졌다. 눈보라에 앞이 보이지 않고 휘청거릴 정도였는데 도로 옆에 쌓인 눈이 키보다 높았다.


무릎 위까지 눈이 푹푹 빠지는 길을 걸어 오 세브레이로 당 안으로 들어갔다. 고요한 그곳에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머물다가 도로변을 따라 내리막길을 걷는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표지판을 구별할 수도 없었는데 아마도 Linares에서 길을 잘못 든 것 같다. 3~4시간을 계속 길을 내려갔는데도 마을이 나오지 않고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녹색과 핑크 화살표가 등장했다. 지나가는 차를 세워 아주머니께 길을 물어봤는데 완전 반대 방향으로 길을 잘못 걸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각 서너 시간 길을 되짚어가며 겨우 오스삐딸 다 꼰데사에 도착했다. 캄캄한 눈 폭풍 속에 알베르게에 도착한 우리를 보고 마태오가 믿을 수 없다며 외마디 소리를 외친다. 오! 환타스틱 걸!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가려고 했으나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비상식량으로 저녁을 대신하기로 했다. 모두가 비상식량을 꺼내 한데 모으니 꽤 근사한 저녁이 되었다. 서로의 음식들을 나누며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각국의 언어부터 경제, 실업난까지 다양한 주제가 심도 있게 오갔다. 사람 사는 모습은 세상 어디든 다 같다.



성배의 기적이 일어났다는 그 자그마하고 소박한 경당은 온갖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대성당보다 아름답다. 로마 시대 이전의 건축물이 오래된 왕국의 양식으로 남아 지붕도 종탑도 성반과 성합도 그저 옛이야기로 머물게 한다.
옛이야기는 신 또는 왕이 아닌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향한다. 신의 아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마구간 구유에 누워있던 이유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스스로 보편적이라 일컫는 교회가 기억해야 할 단 하나의 이유 말이다...                                                                       
                                                                                                       


이전 23화 친구 찾아 삼십 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