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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섬 Jul 29. 2023

아름다운 산길

가진 것 없지만 따듯한 밤


순례 25일 26.5㎞
출발 : 오스삐딸 다 꼰데사 Hospital da Condesa
도착 : 사모스 Samos

가파르고 험한 언덕을 넘어 마을로 들어섰다. 이른 시간부터 한바탕 비탈을 오르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고단함을 아는 듯 언덕은 고도의 높이만큼이나 시원스러운 풍광을 선사한다. 정상의 아름다움은 순간일 뿐 다시 가파른 내리막이다.

조금 더 가면 사리아로 향하는 까미노가 두 갈래로 나뉜다. 산 실 San Xil을 통과하는 길과 사모스 Samos를 통과하는 길로, 산 실을 지나는 루트가 사모스 루트보다 대략 7Km 정도 짧아서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산 실 루트를 걷는다. 우리는 조금 더 먼 사모스로 향했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중의 하나인 베네딕도 수도원이 있기 때문이다. 사모스까지의 우회로는 산티아고 루트 구간 중 가장 아름답다. 개울을 따라 우거진 녹음 사이로 새소리를 들으니 눈 폭풍 한겨울이 하룻밤 꿈처럼 사라지고 봄이다.

사모스의 옛 수도원은 현재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시간별로 진행되는 영어와 스페인어 수도원 투어가 있어서 순례자들은 수도원 안의 아름다운 회랑과 벽화들을 볼 수 있다. 벽화는 성경 속 일화들과 베네딕도 성인의 일생 및 수도원의 역사가 스토리별로 구분되어 그려진 것으로 수도원 내 긴 벽면을 따라 이어졌다. 수도원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레시피로 만들어진 천연비누, 화장품, 피부연고, 치즈, 소시지와 여러 기념품들도 구입 가능한데 베네딕도 수도원의 크림과 연고는 효과가 좋기로도 유명하다.

수도원의 알베르게는 기부제가 아닌 100% 무료로 운영하며 순례자를 환대하고 돌보는 전통을 지금도 이어가고 다. 알베르게 내부도 벽면과 천장에 프레스코화가 있고 욕실이 목욕탕처럼 넓다. 안타깝게도 겨울에 난방과 온수가 제공되지는 않아 덜덜 떨었지만,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않기를 잘했다.



순례 26일 45.5㎞
출발 : 사모스 Samos
도착 : 곤사르 Gonzar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길을 나선다. 수술을 한 다리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는 주기가 점점 더 빨라지고, 빈도가 늘어날수록 강도 또한 높아져 잠을 잘 수가 없다. 서서 움직이면 괜찮은데 자려고 침대에 눕기만 하면 불수의적 떨림이 생겨서, 꼬막 이틀은 잠을 자지 못하고 사흗날 밤에야 기절하듯 쓰러져 자는 패턴이 계속되고 있다. 근육 떨림에 심할 땐 괴로움을 참는 것보다 차라리 걷는 게 낫다. 아네트에게 나중에 만나자며 더 자라 했지만 그녀도 나와 함께 길을 출발한다. 미안하게도 체코 청년 토마스가 우리 때문에 잠을 깨 그도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그는 종종 피리를 꺼내 연주를 해주는데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한참을 걸었지만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다. 오늘 구간에서는 사리아를 통과하게 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00Km가 남은 지점으로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순례를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너무 이른 시간에 출발을 해서일까? 긴 하루에 얼마만큼 걸었는지가 가늠되지 않는다. 오르락내리락 그저 길을 따라 걷고, 바가 나오면 커피를 마시면서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다 보니 사리아를 지나 포르토마린까지 왔다.

이곳은 댐 건설로 마을이 모두 물에 잠기고 현재의 마을을 새로 만든 것으로 긴 다리를 건너 도착하면 수몰된 옛 마을에서 그대로 옮겨온 계단과 당이 순례자를 맞이한다. 원래는 포르토마린에서 묵을 계획이었지만 아직 날이 밝은 탓에 다음 마을까지 더 걷기로 했다. 곤사르까지는 8Km를 더 걸어야 해서 저수지 산책로에 있는 요트 클럽에 들어가 샌드위치와 커피로 간단히 요기를 다.

곤사르는 매우 작은 마을인데 겨울에는 공립 알베르게만 운영을 하고 슈퍼마켓과 사설 알베르게는 운영을 하지 않았다. 문을 연 식당이나 바도 없어서 저녁을 굶게 생겼다. 알베르게에 배낭을 풀고 샤워를 하고 나니 피로와 허기가 밀려온다. 사모스에서 곤사르까지 오늘 하루 무려 45.5㎞를 걸었다. 이곳 알베르게에서 마크를 처음 만났고, 혹시나 문을 연 식당이 있는지 찾으러 다니다가 자전거 순례자인 크레이그와 아르투로를 만났다. 모두들 저녁을 굶어야 한다는 사실에 아연했지만 어쩔 수 없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마크가 미리 준비해 둔 따듯한 차를 내온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커피와 티백뿐이라며 이걸로 저녁을 대신하자며 웃는다. 아네트와 나도 배낭을 뒤져 젤리와 땅콩, 비스킷 찾아 함께 나누었다. 콩 한쪽을 나눈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었네... 가진 것 없지만 무엇이라도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따듯한 밤이다.




함께 오래 하잔 말에
답하지 못했다

언제나 형용사를 꿈꾸었지만
내게 있어 삶이란 동사였고
지키지 못한 약속을 수 없이 보았다

말없이 묵은 먼지를 쓸어내고
삐거덕거리는 문에 기름칠을 하고
비 새는 창틀에 행주를 받치고
멎은 시계 약을 간다

성에를 걷어내 아이스크림을 채우고
향 좋은 비누를 세면대에 올려놓고
벗겨진 전기난로 피복을 감아주고
기운 책상다리를 맞춘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찾아
당신의 공간에
나의 동사를 더한다

함께 오래 하고 싶은
나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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