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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섬 Aug 12. 2023

별들의 들판에 서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


순례 29일 20.1㎞
출발 : 뻬드로우소 O Pedrouzo
도착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

오늘 걷는 구간은 20.1㎞로 비교적 거리가 짧지만 정오에 거행되는 순례자 미사에 참례하려면 이른 새벽에 출발을 해도 시간이 바듯하다. 뻬드로우소 펜시온에서의 밤은 그리 평온하지 못했다. 아네트는 내일이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는 설렘을 감추지 못해 잠을 설쳤고, 나는 그런 아네트를 보며 아무런 감흥이 없는 나 자신이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갈팡질팡 어수선한 마음으로 잠을 설쳤다.

해도 뜨지 않는 깜깜한 길을 나선다. 아네트는 콧노래를 부르며 폴짝폴짝 춤까지 출 기세다. 돌이켜보면... 살면서 기쁨이라는 것이 크게 없었다. 기쁨은 언제나 타인의 것이었고 미소 짓는 근육은 마냥 빈약하기만 하여 사진 속 표정은 웃음도 울음도 아닌 어색함으로 도배되곤 했다. 기쁨도 학습인 걸까? 어떻게 기뻐해야 하는 줄 모르는 생물체의 발걸음은 그저 혼란하다.


언덕이 시작되기 직전 들어간 바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알베르게에서 산티아고 입성 전야제가 밤새 이어졌다며 퀭한 낯빛들을 깨우느라 에스프레소잔이 테이블 위에 가득하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간단히 아침을 먹고 일어섰다. 몬떼 도 고소를 넘어야 한다. 언덕 위에서 비로소 산티아고 대성당의 첨탑을 두 눈으로 처음 확인한 순례자들이 환호를 한다 하여 기쁨의 언덕이라 이름 붙여진 곳에서 나는 어떻게 기뻐해야 할까? 언덕을 오르는 동안 점점 칠판 앞에서 정답을 몰라 쩔쩔매는 아이 같은 마음이 되어 울고 싶어졌다. 이런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발걸음도 신난 아네트를 산티아고로 먼저 보냈다.


화려한 상업지구와 신시가지를 지나 베드로 길(Rua de San Pedro 루아 데 산 페드로)을 따라 구시가지로 들어선다. 마치 타임 슬립을 해 시공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낯선 도시의 소음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현지인과 순례자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관광객들이 꽉꽉 들어차 물결을 이루는 활기가 어찌  까닭인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다. 백파이프연주가 흐르는 광장 아치에 아네트가 있다. "함께 산티아고 대성당을 봐야지! 길 위에서 함께였던 것처럼!" 이 터널만 통과하면 바로 대성당인 것을... 한참 전에 당도했을 아네트가 최종 목적지를 몇 발짝 앞두고 영광의 순간을 유보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마워, 아네트. 어서 가자." 아네트의 손을 잡고 대성당 앞으로 갔다. 거대하고 화려한 대성당의 위용과 순례자들의 열기로 한겨울 오브라이도 광장은 뜨겁다. 대성당 오른쪽으로 난 길로 조금 더 들어가 순례자 사무실에서 순례증서인 콤포스텔라를 받은 후 짐 보관소에 배낭을 맡기고 순례자를 위한 미사에 참례했다.


제대 왼편으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가 순례자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공간이다. 냄새나고 비루한 주인공들을 멀리 떨어뜨릴 수도 그렇다고 가까이하지도 못하는 딜레마를 해결하기에 가장 적당한 위치다. 제대가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자리는 기부를 많이 하는 귀족과 돈 많은 이들의 몫이고, 오늘날 그 자리는 관광객들의 차지다. 제대가 보이지도 않은 구석자리에 계단을 의자 삼아 맨바닥에 많은 동료 순례자들이 앉아 있다. "기분이 어때?" 몇 번 인사를 했던 자전거 순례자 크레이그가 소회를 묻는다. "잘 모르겠어. 내가 원했던 순례의 모습은 아니야. 난 혼자이고 싶었거든. 이렇게 그룹 투어가 될지 몰랐어." 어깨를 으쓱하며 도리질을 하자 크레이그가 힘주어 말한다. "신께서 네가 혼자인 것을 바라지 않으신 거야. 너는 몰랐겠지만 이 길 위에서 네게 가장 필요한 것은 친구였고, 신께서는 네게 그걸 주신 거야." 대향로 Botafumeiro 보타푸메이로가 순례자들의 머리 위로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향을 내뿜는다. 신께 무엇을 아뢰야 하나, 나는 무얼 빌어야 하는 거지...


산티아고 대성당 주변은 순례자가 도착하는 매일이 축제다. 동료들은 산티아고의 흥취에 완벽하게 젖어들었다. 체코 청년 토마스의 피리 연주를 따라 우리는 줄지어 춤을 추며 구시가지 골목을 행렬했다. 마켓에서 식재료를 잔뜩 사다가 알베르게 세미나리오 Albergue Seminario Menor en Santiago de Compostela에서 요리를 해 저녁 만찬을 즐기기로 했다. 마태오와 호세, 마크, 토마스가 오늘의 요리사로 뽑혔고 루비와 타미라, 안나, 엔야, 카트린이 설거지와 뒷정리를 맡았다. 아네트와 나, 에릭, 멘디, 린다 등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어떤 음식이 완성되든 맛있게 먹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기로 했다. 세상에나, 맛있게 먹어주는 역할이라니... 국적과 성별, 나이, 종교를 떠나 이토록 순수한 인연들을 언제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별들의 들판에서 밤이 깊어갈수록 별빛이 진해진다.



슬픔을 잊기 위해 기쁨을 버렸던 삶은 소망마저 품지 못했다. 신 앞에 아무것도 내어놓을 것이 없는 나는 초라한 바람조차 빌지 못하고 땅 끝을 향한다. 땅 끝에서 잃어버린 기쁨과 소망의 조각들을 찾을 수 있을까? 별들의 들판에 서서 내가 잃어버린 것들의 흔적을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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