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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섬 Aug 05. 2023

어느새

D-1


순례 27일 32㎞
출발 : 곤사르 Gonzar
도착 : 멜리데 Melide

허기와 피로에 지쳤지만 따듯한 나눔으로 마음 넉넉했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작은 시골 마을에 이렇게 좋은 시설을 갖춘 알베르게가 있다니 너무나 편하고 좋다. 갈리시아로 넘어오면서 알베르게에 대한 만족도가 많이 높아졌다. 갈리시아 주정부가 현대식으로 새로 짓고 관리하며 순례자들에게 저렴하게 제공하는 공립 알베르게가 곳곳에 있어 순례자들은 보다 편하게 순례를 이어갈 수 있다. 다만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 요리를 할 수 있는 공용 부엌이 있지만 식사를 만들어 제공하지는 않고, 대부분 동네 주민들이 봉사를 하기 때문에 순례자들에게 알베르게 키와 본인의 비상 연락처를 남기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간다.

배가 고파서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지난밤 알베르게에는 아네트와 나, 마크 이렇게 셋만 있고 아무도 없었다. 길을 출발하는 우리에게 오늘은 어디까지 걸을 것인지 마크가 묻는다. 멜리데까지 걸을 예정이라고 하니 마크가 30Km 정도는 가볍지! 한다. 하루 20Km 걷기도 벅차던 빈약한 체력이 어느새 30Km 정도는 가볍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마크와 멜리데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건네고 길을 나섰다. 아른 아침 과연 문을 연 바가 있을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는데 어제 굳게 잠겨있던 바가 문을 열었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갔더니 주인 할머니께서 더욱 반갑게 맞아주신다. 어젯밤 마을에 도착한 순례자들이 저녁식사를 못했다는 소식을 동네 아이들에게 듣고 일부러 문을 열었다고 하신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문을 연 가게가 있는지 모여있던 아이들에게 물었었는데 동네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전했나 보다.

멜리데까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산길을 걷는다. 중간에 만난 루비와 타미라는 까사노바 알베르게에서 머물기로 하고 우리는 멜리데를 향해 길을 계속 간다. 스페인어로 까사는 집을 의미해서 까사노바는 new house를 말한다. 도착한 멜리데 알베르게도 신축건물이라 훌륭하다. 먼저 도착한 마태오가 멋진 뽈뽀 식당을 보았다며 우리를 안내했는데 인생 최고의 뽈뽀를 만났다.



순례 28일 34㎞
출발 : 멜리데 Melide
도착 : 뻬드로우소 O Pedrouzo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100Km 앞둔 사리아를 지나면서부터 순례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멜리데의 알베르게도 순례자들이 꽉꽉 들어찼고, 식당이며 바며 어딜 가나 순례자들이 넘쳐나 소란스럽다. 길을 걷다 보면 시간 날짜 요일 개념이 없어지고 오로지 걷는 행위에만 집중하게 되는데, 떡갈나무와 유칼립투스 군락들을 지나 뻬드로우소를 향하면서도 오늘이 순례를 시작한 지 28일째 D-1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룻밤만 지나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다는 사실에 아네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하루 종일 신이 났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나는 감흥이 일지 않는다. 늦은 밤 도착한 뻬드로우소 알베르게는 순례자로 만석이라 베드가 없어 바로 길 건너편 펜시온에 겨우 방을 잡고 지친 몸을 뉘어 숨을 고른다. 내일이면 산티아고다...



종착지까지 단 하루를 남긴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한 순례자의 무덤이 있다. 순례길 위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당도하지 못하고 눈을 감은 수많은 순례자들의 무덤이 산티아고를 향해 있다. 이천 년을 이어 온 길이니 그 길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란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나 많은 무덤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대부분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지만 지금은 교통사고로 숨을 거둔 이들이 대부분이다. 순례자들이 순례자들의 무덤 위에 들꽃을 얹는다. 못다 한 순례자들의 꿈을 한 움큼 나누어지고 대신 자신의 바람을 한 움큼 떼어 두고 산티아고로 발걸음을 옮긴다. 순례자의 꿈이 그렇게 산티아고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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