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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섬 Aug 19. 2023

계속 이어진 길

묵시아


순례 30일 21㎞
출발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
도착 : 네그레이라 Negreira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 조용히 일어나 신발끈을 매고 배낭을 멨다. 늦은 시각까지 이어진 완주 기념 파티로 모두들 꿈나라다. 어젯밤 그들과 함께 웃고 또 춤을 추었지만 텅 빈 마음엔 모래 바람이 일었다. 동료 순례자들의 만류를 뒤로하고, 결국 땅끝까지 순례를 계속하기로 한다. 이 공허함이 무엇인지 나는 내 마음을 알아야만 기 때문이다. 잠든 그들의 머리 위로 작별을 고한다. '고마워 친구들! 너희들로 인해 별 탈 없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어. 너희와 함께 기쁨과 영광을 나누고 싶지만 어찌 된 까닭인지 그것들은  것이 아닌 것만 같아. 너희들은 달릴 길을 다 달렸고, 훌륭한 레이스였어. 우리들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겠지만 아디오스란 인사보다 차오란 인사를 하고 싶어. 너희의 앞길에 축복을... 부엔 까미노!'

내가 떠나려는 것을 눈치챈 아네트가 대성당까지 배웅을 나온다. 골목 바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쉬움 가득한 인사를 나누었다. 시가지를 벗어나자마자 가파른 언덕이다. 언덕에 올라 뒤를 돌아보니 산티아고 대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친구들은 지금쯤 일어났을까? 한국식 해장국을 끓여주었다면 열렬히 맘마미아! 환타스틱! 을 외쳤을 너희들...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숲 길을 걷는다. 오늘 도착지인 네그레이라까지는 21㎞, 쉬엄쉬엄 걸어도 될 거리이다. 묵시아-피스테라길은 나흘 120km 구간으로 보통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순례를 마친 이들이 피스테라 0.0Km 표지석을 보기 위해 소풍처럼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100km가 넘기 때문에 이 구간만 걸어도 콤포스텔라(순례증명서)가 발급되지만 걷는 순례자가 그리 많지는 않다.

점심때가 조금 지나 네그레이라에 도착했다. 한적한 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사람이 없을 줄이야! 겨울이라서 그런지 정말 단 한 명의 순례자도 만나지 못했다. 네그레이라 알베르게도 문만 열려있고 아무도 없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는데 코끝이 찡하다. 그토록 혼자이고 싶었는데 막상 홀로 이 길을 걸으니 허전한 기분이 이상하다. 그런데 샤워기 물소리 사이로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은섬! 은섬! Anybody here?" 누구지? 환청인가? "I'm here!" 물을 뚝뚝 흘리며 황급히 나가보니 마크가 환하게 웃고 있다. "마크! 이게 무슨 일이야!" 곤사르에서 처음 만났던 그가 저녁 찬거리를 손에 들고 이곳 네그레이라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특별히 페페론치노를 넣은 파스타를 만들어 주겠다며 와인까지 준비해 온 마크. 땅끝까지 신께서는 이렇게 친구를 주시는구나...



순례 31일 34㎞
출발 : 네그레이라 Negreira
도착 : 올베이로아 Olveiroa

일찍 일어나 다시 길을 나선다. 땅끝까지 이르는 길은 도로와 울창한 유칼립투스  숲이 번갈아 이어진다. 마크는 새를 연구하는데, 길을 걸으면서도 새소리가 들리면 망원경으로 관찰을 하기도 하고, 도감과 비교하며 이런저런 설명을 해준다. 녹음해 놓은 새소리를 들려주며 새들의 사투리가 다름에 신나 하는데 나는 아무리 들어도 같은 소리다.

시골 마을인 올베이로아는 목축이 주업이라 농장들이 많다. 오늘 우리가 묵을 알베르게도 소 농장을 겸한다. 겨우내 축사에만 있던 어미 소들이 봄을 맞아 처음 들판에 나와 풀을 뜯는다. 어린 송아지들에게는 추운 날씨라 축사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직 이르다. 어미와 떨어진 송아지들이 어찌나 엄마를 찾는지 음~메~ 소리가 엄~마~로 들려서 송아지가 우리말을 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부엌이 없는 알베르게라 식당을 겸하는 작은 티엔다(식료품점)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티엔다 주인이 남미에서 온 이민자다. 그녀는 순례객이 드문 겨울에 스페인어가 통하는 말동무를 만난 것이 반가워 마크를 붙잡고 한참이나 이야기를 한다. 나는 스페인어는 모르지만 저녁을 먹는 동안 마크의 통역 없이도 그녀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아들었다. 남편 하나 믿고 멀고 먼 스페인까지 와 자리 잡았지만 오가는 사람 없는 시골에서 구멍가게를 보며 꼼짝 못 하는 신세를 하소연하는 것이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나 같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나와 마크와 가볍게 산책을 하는 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떴다. 길 위에 총총한 마음들처럼.



순례 32일 34㎞
출발 : 올베이로아 Olveiroa
도착 : 묵시아 Muxia

올베이로아를 벗어나면 곧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묵시아를 먼저 간 후 땅끝으로 가는 길과 땅끝에 이른 후에 묵시아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묵시아에 먼저 가고, 땅끝을 최종 목적지로 삼았다. 산과 바다가 교차하는 길은 생각보다 험해 걷는데 많은 시간이 들었다. 마크와 함께 걷는 길이지만 걷는 중에는 각자의 페이스에 맞춰 따로 걷는다. 마크를 먼저 앞세워 보내고 아등바등 걷다 보면 바람결에 바다내음이 실려온다. 염분이 섞인 축축한 공기는 외할머니의 냄새처럼 눈을 감고도 알아챌 수 있다. 묵시아 공립 알베르게는 새로 지은 건물로 규모가 크고 무척이나 깨끗했다. 그 큰 공간에 순례자는 마크와 나, 단 둘이다. 묵시아의 해넘이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저녁을 먹고 한 손에는 겨울딸기, 다른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오스피탈레로가 알베르게 키를 우리에게 맡기고 퇴근을 한다. 2층 샤워실은 남녀 구분은 되어 있으나 문이 없어서 내가 당황해하자 마크가 나중에 씻겠다고 1층 다이닝 테이블에 앉는다. 나를 배려한 마음이 고마워 얼른 씻고 나와 1층을 내려다보며 마크에게 어서 씻으라는 말을 하는데 그만 안경이 1층으로 떨어져 테가 깨지고 데굴데굴 안경알이 굴러가 사라져 버렸다. 안경이 없으면 30cm 앞도 분간하지 못하는 시력이라 마크가 알베르게 바닥을 몇 시간이나 샅샅이 훑어 안경알을 찾아 주었다. 안경알을 찾았을 때 둘이 얼마나 크게 환호성을 질렀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안경 하나로 유쾌한 밤이다.



당신이 있던 그곳에
오래전 남겨진 꿈
한때 푸르렀던 그것은
비쇠해 바랬지만 품위만은 정갈하다

세월은 견고함에 균열을 내
많은 것들을 잃어 고요해도
괜찮다
삶은 다 그런 것이다

오늘도 바닥을 닦아내고 닦아내
끈적이는 것들을 지워나간다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카락처럼
끊임없이 달라붙는 것들이 사라지도록

스스로를 구할 수 없다면
서로가 서로를 구하면 된다
당신의 꿈으로 내가 살고
내 꿈을 당신이 일깨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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