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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섬 Aug 26. 2023

0.0Km 땅 끝

피스테라


순례 33일 31㎞
출발 : 묵시아 Muxia
도착 : 피스테라 Fisterra(피니스테레 Finisterre)

다른 순례자가 없는 알베르게의 밤은 조용하고 한가하다. 식료품점에서 산 먹음직스러운 겨울딸기를 씻어 접시에 담고 널찍한 식탁에 앉아 마크는 책을 읽고, 나는 그런 마크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유를 즐긴다. 식탁에 앉아 TV도 인터넷도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저녁은 얼마나 달콤한가.


간밤의 호사에 감사하며 땅 끝을 향해 길을 나선다. 묵시아와 피스테라 구간은 노란색 화살표가 각 목적지를 향해 양방향으로 되어 있다. 울창한 유칼립투스 나무가 겨울의 껍질을 벗어내느라 바쁘다. 오르락내리락 한적한 길을 콧노래와 함께 걸으면 배낭의 무게도 잊게 된다. 하루 10시간 30Km씩 걷다 보면 내게 맞는 휴식 포인트가 생기는데 나의 경우에는 배낭을 멘 채로 서 있거나 속도를 줄여 천천히 걷는 방법이 배낭을 내려놓고 앉아서 쉬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완전히 이완된 근육을 다시 긴장시켜 걸으려면 워밍업이 되기까지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너무 힘든 날은 밥도 서서 먹으며 알베르게 도착까지 종일 앉지 않았는데 그런 날들이 모여 이제 곧 땅 끝 0.0Km라니 감회가 깊다.


오솔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시야가 확 트이더니 바다가 나타난다. 언제나처럼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며 바다내음에 집중하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마크가 눈앞에 있다. 피스테라 알베르게는 늘 사람이 많아서 과연 베드를 배정받을 수 있을지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딱 우리까지 침대를 받고 만석이 되었다. 세탁 서비스가 무료라 짐을 풀어 밀린 빨래를 맡기고 약 3Km 떨어진 제로 킬로미터 표지석까지 마크와 함께 걸었다. 이제는 배낭 없이 걷는 길이 어색하다.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 속에 고요히 서 있는 표지석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땅 끝을 가리킨다. 0.0Km... 대서양을 향하고 있는 피스테라의 석양이 가만히 이마에 어깨에 무릎에 머물다 이내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내 마음에는 커다란 마침표가 남았다. 이제껏 늘 타인에 의해 찍히던 나의 마침표를 비로소  손으로 직접 찍은 것이다.


출렁이는 마음을 안고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에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들렀는데 왁자지껄 소란하다. UEFA 챔피언스리그가 는 날이어서 동네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며 응원을 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마침 스페인과 영국의 경기라 마크와 나는 자국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현지인들 틈에서 남몰래 속으로 영국을 응원한다. 0:0 지루하던 게임에 영국이 먼저 골을 넣었다. 마크와 나는 소리 나지 않게 맥주잔을 부딪치며 자축을 했지만 결국 경기 결과는 3:1 스페인의 승. 골목이 떠내려갈 정도로 환호하는 이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계산을 하고 나가려는데 식당 주인이 마크에게 너 영국인이지? 물으며 기분 좋게 웃는다. 마크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눈치챘어? 답하자 식당에 있는 모두가 우리를 향해 응! 알고 있었어! 라며 멋진 경기를 보여준 영국팀을 추켜세운다. 호탕한 웃음의 식당 주인이 기분이라며 우리의 식사 값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주민들이 너도나도 우리의 식사 값을 대신 계산하겠다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고 난리가 났다. 극구 돈을 받지 않겠다는 주인과 서로 앞다퉈 대신 계산을 하겠다는 주민들과 제발 우리가 먹은 것을 계산하게 해 달라는 순례자의 극적인 합의로 우리는 맥주값을 제외한 식사비만을 지불하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값을 치르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현지인들의 따듯한 환대로 마음이 몽글몽글하다. 이렇게 순례는 막을 내렸고 내일이면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간다.



다른 이의 삶을 그 누가
함부로 실패라 할 수 있을까
스스로의 삶을 어느 누가
섣불리 실패라 한단 말인가
신조차 꺼내지 않을 그 말을
한낱 경험일 뿐인 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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