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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섬 Sep 02. 2023

다시 산티아고

에필로그


묵시아와 피스테라(피니스테레)까지 120Km 길을 더 걷고 산티아고로 돌아왔다. 산티아고 대성당은 여전히 순례자들의 열기로 가득한 광장을 품고 웅장하게 서 있다. 불과 며칠 전 마주했던 산티아고는 언제나 그렇듯 변함없지만 뭔가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흥이 달라졌다.


알베르게 세미나리오에 짐을 푼다. 마크는 바로 영국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공항으로 출발해야 했지만 세미나리오에 내가 짐을 푸는 것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순례길 내내 볕이 쨍한 바다에서도 선글라스를 끼지 않던 마크가 하늘이 잔뜩 흐린 세미나리오에서부터 줄곧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그의 표정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서로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을 주고받는 데에는 언제나 많은 단어가 필요치 않다. San Pedro 거리 모퉁이라는 이름의 바에서 우리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인생의 경계 진 구석 모퉁이에서 우리 각자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비워내고 또 채웠다. 개인의 무엇이었지만 머나먼 타국에서 약속하지 않은 길을 걸으며 서로를 지켜봐 주었고 길 위에서 만난 모두가 모습을 바꾼 천사가 아니었을까 생각될 만큼 우리는 서로를 챙기고 보살피며 그렇게 무엇이 되었다.


지는 노을 뒤로 마크를 보내고, 나는 다시 대성당 앞에 섰다. 나는 왜 이곳에 왔을까는 더 이상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질문이 사라지자 이 길이 나에게 무엇을 깨닫게 했는지, 혹은 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대한 대답도 중요하지 않다. 나를 둘러싼 조건이나 상황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 또한 변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 깊이 무언가 반짝이는 이정표가 하나 세워졌다. 여전히 지치고 힘들 일상의 부침마다 가만히 나를 위로해 줄 무엇이...


날마다 열리는 순례자들의 축제 사뭇 이방인다운 눈길을 보내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머무는 동안 아침 점심 저녁 시시각각 같으면서도 다른 대성당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파티마를 거쳐 파리에 왔다. 처음 파리에서 출발하여 다시 파리까지 41일,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42일의 긴 순례가 그예 끝났다. 겨울을 통과한 봄이었다.



서쪽으로 가는 동안 저는 해를 등지고 저의 그림자를 끝없이 마주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향해 걷는 그 길을 따듯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시고 함께 걸어 주신 많은 글벗들께 진심 어린 감사와 다정한 인사를 보냅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서쪽 길 위에서 우리가 만난다면 제가 꼭 카페 콘 레체를 사겠습니다. 언젠가 서로의 그림자를 끌어안을 날을 기다리며...

"Buen Camino!"
(부엔 까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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