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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영 Aug 06. 2023

학교 미술을 가르쳐주세요

어른이 원하는 미술을 어린이에게 바랬다


미술은 공부와 다르다. 같은 정답이 아닌 모두 다른 답을 찾는다.
하나 학교미술로 미술을 준비한다면 다양한 시도는 하지 않는다.
다양한 매체도 다뤄보지 않는다.
어차피 학교에서는 그런 미술, 할 수 없으니까.     






“학교미술을 좀 가르쳐 주세요.” 

학교 미술은 그냥 미술과 다른가? 난 이 물음에 늘 생각이 많았고, 반드시 풀어가야 할 커다란 숙제 같았다. (여기서 학교는 초등학교다)

내가 생각해 본 부분은 이 요청에 사용된 어휘다. ‘학교 미술’

이 미술은 학교에서만 필요한 미술인 것 같다. 미술 앞에 학교를 붙여서 ‘학교 미술’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이상한 건 학교가 아닌 학원에서 가르쳐달라고 한다. ‘사교육 미술’로 ‘공교육 미술’을 배워가기.     


그럼 학교는 어떻게 미술을 가르칠까. 학교 미술환경을 생각해 본다.     

일반적으로 담임선생님이 미술을 가르친다. 담임선생님은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다. 보통 한 반 정원은 25명 내외. 담임선생님은 25명을 혼자 가르친다. 교실의 작은 책상 위에서 아이들은 나누어준 재료로 미술을 한다.           

「왜 학교는 예술이 필요한가」에서 책상 위 미술 table-Top-Art는 예술이 일어나기 어려운 교실에서 행해지는 미술형태라 말한다. 책상 크기와 교실 정돈 상태에 제한되는 미술을 말하며, ‘선 안에 색칠하세요’나 오리고 붙인 종이 조각 등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고 언급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스튜디오나 미술실에서 제작된 예술 작품은 규모를 크게 할 수 있고 풍부하고 번잡한 매체 표현을 시도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자주 학교에서 미술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의심했다. 교실은 아이들이 다양한 상상을 꺼내고, 창의성을 발휘하기에 뭔가 경직되고 딱딱해 보인다. 

어수선해지지 않는 범위에서 자리를 지키며, 정해진 시간에 완수해야 하는 틀이 있는 것만 같다. 다른 생각이 받아들여질까. 망치고 실패할 수 있을까. 엉뚱할 수 있을까. 자칫 미술의 실힘과 창작은 수업의 흐름을 깨는 방해요소로 존중받지 못할 수도 있을 터.     

그럼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학교미술을 왜 사교육으로까지 배워가야 하는 걸까 궁금증이 일었다. 

이 미술, 준비해줘야 하는가.          


자체적 판단이지만 학교미술을 요청한 엄마들은 이런 것 같다. 내 아이가 학교에서 그림을 못 그리면 주눅 들지 않을까, 미술을 어려워하는 걸까, 색칠 연습을 시켜줘야 하나? 우리 아이는 색칠하는 거 싫어하는데. 선생님이 내 아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미리 준비라도 시킬걸. 나도 아이가 학교에서 미술 시간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주눅이 든다고 생각하면, 매일 밤 미술을 연습시키고픈 마음이 들 거다.

우리들 엄마의 마음은 그렇다.          


그렇지만. 이런 염려들로 본격적으로 미술이 잘못되기 시작한다. 유아 시절 창의성을 소중히 여기며 아이의 미술을 존중하고 격려했던 마음은 없어지고, 갑자기 모른 척한다. 내 아이의 미술을.     

아무래도 사교육에서 배우는 학교미술용 그림은 이렇다. 단편적인 방식으로 인물 그리는 법, 건물 그리는 법을 습득하게 한다. 색칠도 꼼꼼하게 다 칠해야 될 것 같은 답답하고 건조한 그림방식이다. 미술을 그리기 연습처럼 배우고 적당히 암기도 한다. 

그런데 미술은 공부와 다르다. 같은 정답이 아닌 모두 다른 답을 찾는다. 학교미술로 미술을 준비한다면 다양한 시도는 하지 않는다. 다양한 매체도 다뤄보지 않는다. 어차피 학교에서는 그런 미술, 할 수 없으니까.     

  

학교에서 미술은 불가능 한걸까.

적절한 공간-미술작업실, 적절한 정원-소규모 분반 활동, 확장되고 전문적인 재료 그리고 ‘미술전공 교사’가 있다면, 학교에서도 미술교육은 가능하다.

사실 난 학교에선 왜 미술을 전공자가 아닌 담임선생님이 미술을 가르치는지 이해된 적이 없다. 담임선생님에게 책임은 왜 이리 많은가. 중요한 시절을 보내는 어린이들에게 왜 미술을 잘 가르치려 연구하지 않으며, 왜 많은 미술전공자들이 학교에서 교육하지 못할까. 

왜 학교는 어린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미술의 배움을 비전공자에게 책임 지우고 있을까. 제도나 정책적으로 그래야 할 특별한 사정이 있는가. 있다면 어린이보다 대체 뭐 그리 중요할까.         


매년 노력과 수고를 들인 양질의 미술교과서는 폐품으로 버려진다. 매년 수십, 수백억의 예산이 쓰레기통으로 벼려진다는데, 미술교과서는 나의 어릴 때나 지금이나 버려지긴 마찬가지다. 원래 그런 거고 계속 그래야만 하는지. 교과서는 버려지더라도 형식적으로 만들어놓고 정작 학교에서의 미술은 어른의 수준을 적당히 낮추어 가위로 종이를 오리거나 재료를 붙이고, 클레이를 주무르고 만들고, 무언가를 찍는 정도의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지역사회예술기관이나 문화공간에서 예술강사로서 활약하고 있는 선생님을 보면, 학교 안에서도 어떤 예술이 가능할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미 많은 아이들은 학교가 해주지 못한 예술을 지역사회예술기관, 미술관과 박물관 등에서 채운다. 하지만 이것도 예술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을 아는 가정의 아이들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예술은 이렇게 학교에서부터 차근차근 삶과 동떨어지게 되면서 성인이 되어 고고하게 미술관 속 예술로 우리 앞에 서있다. 영 어색하게.     

존듀이는 「경험으로서의 예술」에서 말한다. 과거 예술작품이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면서 인간의 경험이나 체험에서 분리되어 왔다고. 예술은 고전적 지위를 획득하여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인정된 작품이 예술로 인식됐고, 삶으로 연결되지 않은 예술은 가치를 얻지 못한 채 모호화되었다는 걸. 학교도 암묵적으로 예술을 소개하거나 홀대해 왔다. 그렇게 예술은 특권화하거나 사소화된다.      

솔직히 나는 학교교육에서 미술은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학교 교육이 미술을 지켜주지 않을 때, 아이들의 미술을 일상의 삶으로 연결되기 어렵다. 

          

학교에서 미술의 위치를 알고 있다. 과거에도 지금도 우리는 비슷한 미술을 하고 있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교육개정안은 시대 흐름을 반영하여 발표되지만, 실제 미술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형편이다.

학교 밖 교육수요자는 학교미술을 찾고, 사교육에선 그 미술을 가르치고, 아이들은 다시 그런 미술을 하고, 그렇게 함께 재생산한다.      

내가 택한 방법은 나의 교육원에서 학교미술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미술과 어린이를 사랑하는 교육인으로서 학교미술은 누구를 위한 미술인지 답을 찾지 못했다. 학교선생님에게도, 엄마에게도. 무엇보다 어린이에게.



책상 위 미술 table-Top-Art 





미술을 가르치고 공부하고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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