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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영 Aug 07. 2023

여행지에서 종이를 주는 구식 엄마




어머님, 여행갈 때 미술도구를 챙겨가세요.



"어머님, 여행갈 때 미술도구를 챙겨가세요."

"원장님, 미술도구라뇨. 우리 아이는 그림 안 그려요. 아이~ 저흰 못해요."

"원장님 말은 알지만, 그게 그렇게 되진 않잖아요." 

조금 더 말하고 싶었지만, 혹여 불편할까봐 멋쩍은 웃음으로 상황을 눅였다.   

                 

그렇게 말한 건, 내 전적 때문이다.

아들이 두 세 살쯤 제주도에서의 일이다. 조식 시간에 아들은 시끄럽게 보챘다. 

다른 테이블은 다 조용한데 내 아이만 유독 시끄럽게 울거나 때를 피웠다. 사람들에게 방해되는 것도 싫고 뭔가 아이가 좀 부끄러웠다. 분명 아기들과 어린아이들은 많았다. 

그런데 어떻게 다 조용하지? 주변을 자세히 보니 모두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테이블마다 테블릿 PC가 있었다. 영상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잘 시청할 수 있도록 거치대도 반듯이 설치되어 있었고, 2명의 자녀가 있는 경우는 각각 눈 앞에 한 대씩 세팅되어 있었다. 

마치 비행기를 타면 좌석 앞에 영상을 볼 수 있는 모니터 화면이 있듯. 


아 저렇게 하는 거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도 안주고, 식사도 맛있게 할 수 있고. 

나도 미리 준비라도 할 걸. 남편과 나는 작은 스마트폰을 꺼내 아이가 좋아할 만한 뽀로로를 틀었다. 스마트폰 거치대도 없어서 냅킨을 두는 작은 통을 의지하여 아들의 눈높이에 맞춰주려 안간힘을 썼다. 

식사하고 싶었다. 우아하게. 


아들은 금방 뽀로로 영상에 집중했다. 이렇게 식사 한 게 얼마만이야. 엄마가 되고선 늘 밥이 코로 들어가는 지 귀로 들어가는 지 몰랐는데 영상 하나를 틀어줬을 뿐인데, 바깥 풍경도 보고, 남편과 대화도 나누고, 아들에 입 속에 밥만 넣어주면 되니 편했다. 

아들도 입을 벙긋 벙긋 벌리고 밥도 여느때 보다 잘도 받아 먹었다. 그런데 아들 표정이 이상했다. 

아무 생각 없는 무표정. 마치 영혼이 훅 빠져나간 듯. 눈동자는 멍했다. 생기가 없었다. 

그 날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이건 좋은 시간이 아니었다.               


   

「프랑스 아이는 말보다 그림을 먼저 배운다」에서 프랑스 아이들은 레스토랑에서 종이나 냅킨에 그림을 그리고 어른들은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프랑스 식당에 가면 간단한 미술도구를 준다는 것. 나는 여행갈 때 미술재료를 챙겨가 보기로 마음 먹었다.

엄마로서 미술선생님으로서 난 아이가 그림을 그리길 원했다. 

아이가 정말 그림을 그릴까? 내겐 호기로운 도전이었다.


특별히 여행을 갈 때 미술도구를 챙기기로 한 건, 여행이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과 영감을 주기에 적절한 장소여서다. 새로운 생각과 영감은 미술하기 좋은 재료니까.     

 

처음엔 종이를 주면 옆으로 치우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지. 여행의 흔적을 대화 나눴다. "어제 본 것 중에 주호는 뭐가 기억나?" 아들은 도통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 

여러번 대화를 더 건내봤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때를 쓴다.

이 시간을 영상 시청에 내주지 않으리라 단단히 각오한 나는 먼저 어설프게 끄적이듯 그렸다. 


이 때 너무 완벽히 그리면 안된다. 유아 시기의 아이는 무엇을 그려도 어른보다 잘 그릴 수 없다. 애써 시작한 활동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적당히 유머를 겸비한 출중한 연기도 필요 하다. 

왼손으로 그릴 법한 아메바 같은 형상에 아들이 반응했다. 드디어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성공.



          

여행지에서 그린 첫 그림

   

           

보스턴 대학 연구진은 아이가 소란을 피울 때, 아이의 기분을 전환시키는 방법으로 스마트기기를 주는 것에 대해 엄히 경고했다. 그것은 자연스런 감정의 표현, 문제의 해결, 진짜 상상력을 가질 여러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생각을 못하고 빠르게 하는 것에 습관화되는 것의 가장 큰 주범은 스마트폰 아닐까.

미술 시간에 생각을 대신해달라는 아이들, 정해달라는 아이들, 생각이 안 난다는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귀한 ‘생각’을 다른 사람이나 스마트폰에 의지하게 된 아이들. 괜찮을까.


스마트기기 앞에서 종이는 참 무미건조하다. 스마트기기는 간편한 세상을 만들었지만, 사고하는 것 마저 간편화시켜 버렸다. 

아이들은 생각하고 집중하고 긴 호흡을 이해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한다. 깊게 사고 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뇌가 한창 발달하는 유아부터 10대 시절 디지털 기기를 많이 접하면 뇌에서 집중력·논리력 등과 관계된 전두엽은 덜 발달한다. 

화면이 빠르게 움직이는 화려한 이미지를 봐 온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느리게 하는 활동을 좋아하게 되는 건 힘든 일이다. 더 빠르고 쉽게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들을 찾게 된다.       


나는 반대로 느리게 하는 일을 추천하고 싶다. 내가 아는 최고의 느린 일은 독서하고 그림 그리는 것이다.

종이와 만나는 일이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함께 사는 미래세상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생각하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 시간은 생각하는 아이로 자라게 할 거라는 믿음이 있다. 


뉴욕타임즈는 스티브잡스를 '구식 아빠'라고 일컬었다. 잡스가 세자녀에게 스마트기기의 사용을 제한한 건 너무도 유명한 일화다. 트위터와 블로그를 내놓은 에반윌리엄스도 통화와 문자만이 가능하도록 통제했다. 

IT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이 스마트폰 대신 종이책을 주었다.


엄마로서 선생으로서 나는 매체에 보수적이다. 

사실 우리의 어린 시절처럼 스마트폰이 없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다. 달라진 세상에서 그런 생각이 한심할 수도 있겠지만, 느리게 시간을 쌓는 독서와 그림을 그리는 일, 글을 쓰는 일, 멍 때리는 일을 하자고 내가 만나는 아이들과 엄마들, 선생님들에게 전파한다. (잔소리가 아니길 바라며)     



      

여행을 갈때면 종이를 챙겼다








미술을 가르치고 공부하고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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