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영 Oct 21. 2023

사실적 재현의 틀 밖으로 나오면 미술이 보인다




아들이 3학년 때, 학교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을 가져왔다. 

형태가 아닌 ‘색’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아니, 학교에서 이런 그림을! 


자신이 좋아하는 색들로 느낌을 충만히 표현했다. 붓질의 강약, 물의 농도, 색의 조화, 뿌리기 기법을 통한 번짐의 연출. 그림의 변화를 봐가며 긴장했으리라. 멈출 것인지, 더 갈 것인지를. 



학교에서 그린 그림  '어둠에 밤'




이 날에 아들은 ‘그리기’보다 ‘색’으로 미술을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사실적 형태 재현’의 그림이 아니어서 왜 반가웠을까. 미술에는 견고한 ‘틀’이 있는 것 같다. 알아볼 수 있는 것들로 그려야 하는 것.     


우리가 미술의 가지는 기대는 대부분 이런 것 같다. 

미술가의 미술을 보면 다양한 방식과 표현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우리 아이는 우선 그림을 좀 알아볼만하게 그렸으면 한다. 보편적으로 어떤 형상을 사실적으로 똑같이 그렸으면 하는 마음, 그래야 잘 그린 것 같은 마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보면 대단해 보인다거나 부럽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물론 아까도 말했듯, 미술이 사진처럼 똑같이 그려야 잘 그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지민, 내 아이가 그린 추상미술은 왠지 당황스럽다. 지금 그런 걸 할 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겨우 시간 내서 미술학원을 보냈는데 형태가 보이지 않는 그림이라면? 반갑지 않다. 미술이 아니라 장난아닌가? 장난을 한 미술가가 있을지라도. 우리 아인 미술가는 아니니까. 지금은 배워야 할 나이니까.   

   

나의 교육원엔 수업 후 브리핑시간을 가진다. 

그 날 수업의 주제와 수업 중 어떤 면에 관칠되었는지 그림에 그려진 내용을 들을 수 있다. 엄마들은 그림에 담긴 아이의 생각이나 상상을 듣게 되면 웃거나 미소지었다. 그런데 보통 사실적 형상을 잘 그린 그림 앞에선 오~. 와~. 같은 감탄사가 나왔다. 소묘,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 그리고 이것이 실제와 비슷할수록.

“정말 우리아이가 했어요? 너무 잘했다. 똑같다.”    

  

그렇다면 아이는 엄마의 반응을 어떻게 생각할까? 자신의 상상이나 생각을 마음껏 펼친 그림보다 엄마가 좋아하는 그림, 어른이 감탄하는 그림이 맞는 그림이라고 생각하게 되진 않을까. 자주 그런 반응에 노출되면 아이는 그 말을 흡수하고 학습한다.


사회학자들은 사회적으로 옳다고 판단되는 상황으로 학습되고 노출되면서 그것은 ‘사회화’된다고 했다. 아이는 어른들이 원하는 미술에 대한 반응을 배우고, 그렇게 사회화 되어간다.     

여기서 꼭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고자 기술적 표현의 연습이 불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술적 표현은 창의적인 표현을 위해 마땅히 필요하다. 창의적인 생각이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구체적으로 도화지에 나타내지 못한다면 상상으로만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다만 창의적 표현을 위한 시도들이 사실적 표현을 해야한다는 어른의 기대 속에 사그라들지 않기를 바란다. 


킨들러Kindier는 많은 교사들이 사실적이지 못해 교사를 당황하게 만드는 그림을 부족한 그림으로 판단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도 여전히 이 오류를 재생산하는 어른들은 아닐까.   

   

사실적 그림의 연습보다 더 중요한 건 아이마다 가진 ‘고유한 그림체’다. 미술을 배우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그림’을 충분히 만끽하고 개발시키는 거다. 기술적 연습을 해야한다는 압박 속에 자신에게 꿈틀거리고 있는 이 순간에 그려지길 원했던 그림들이 꽃 피우지 못한다면, 진짜 미술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른이 어린이의 그림을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미술가의 작품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듯. 어린이의 그림도 노력하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다. 어떤 생각과 감정, 경험을 그렸는지. 생기로운 그림체, 고유한 색, 말도 안되는 표현 방식이 보이지 않는다.
유명한 미술가들이 어린이 그림처럼 그리길 원했던 것을 알고 있는가. 피카소는 말년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작업실에 어린이들과 함께 생활했다. 어린이만이 순수한 미술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가끔 어린 내 시절을 생각한다. 내가 그림 그리고 있는 모습. 선생님은 샘플을 준비했다. 난 그걸 따라 그린다. 또 다른 날도 선생님은 시범을 보인다. 난 그걸 따라 그린다. 선생님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는 내 모습. 나는 선생님의 그림 말고, 내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난 그 때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아이였을까. 


아이의 미술은 어른을 위한 의무들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의 글에서 여러번 강조할 수 밖에 없다. 

아이의 시간은 흐르고, 그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전 13화 여행지에서 종이를 주는 구식 엄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