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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나 Jan 10. 2023

겉만 멋진 문제 사원

영주는 대기업에 입사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우선 그동안 면접에서 수차례 떨어지며 안타깝게 바라봤던 친척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안되려나보다, 포기해야겠네라는 시선으로 그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며 어쩌면 안도감을 느꼈을 그들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

"한번 들려라."

"자주자주 들리고."

"어떤 일을 하는 거니? 네가 다니는 회사와 일한 적 있었는데."

하면서 살가운 척을 했다.

입사 후 6개월의 신입사원 교육은 선배들 말처럼 꿀같았다. 동기들과 함께 보내며 서로 의지가 되고 교육 후 업무를 맡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설렘이 가득했다.

교육 후 첫 출근 날, 영주 부서는 개발 파트였다. 주임과 선임, 파트장이 각각 1명에 , 인도 지사에서 파견된 직원 1명이 있는 다른 파트보다 꽤 작은 인원의 팀이었다. 유일하게 영주만 여자였다. 다른 동기들은 두세 명씩 같은 부서로 배정받았는데 영주는 근처에 동기는커녕 왜 혼자만 여기로 배정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신입사원 오영주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여자 신입사원이 들어왔다며 선임과 파트장은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그러나 박주임은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색한 웃음을 내비치며.

"아. 신입사원 남자분이 오셔야 하는데 그래야 일을 편하게 시키는데. 참."

"편하게 시켜주세요. 부지런히 배울게요."

얼마나 많은 일을 시키려는 건지 주임의 표정과 말투에 조금 두려웠지만 작은 팀인 만큼 금방 가까워질 수 있겠다며 어색한 그 공간에서 애써 장점을 찾으려 했다.

"영주 씨, 이건 할 줄 알죠? 이거 해보세요."

"네..?"

"여기 설명 잘 나왔으니 한번 해보세요."

영어로 된 두꺼운 문서를 책상에 놓더니 본인 자리로 휙 가버렸다. 

"영주 씨, 다했어요? 실수하면 안 돼요. 잘못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고."

실수하면 안 된다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본인 말만 하고 쌩하니 자리로 가버리는 주임에게 물어보면 왠지 방해가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첫날부터 영주는 식은땀이 났다.

"주임님, 여기에서 어떻게 하는 거예요? 정확히 모르겠어서요."

"어휴. 신입이 와서 일이 덜어야 되는데 내 일이 배가 되네. 내 업무도 모자라 신입사원 일을 일일이 다 가르쳐줘야 하나."

그때부터였을까. 박주임의 눈치보기.


매일 출근하면 영주의 업무 강도는 박주임의 기분에 따라 달라졌다. 박주임이 영주 멘토이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영주는 너무나 견디기 힘들었다. 그나마 선임이 영주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파트의 업무 실세인 박주임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직급이 높더라도 업무의 힘든 문제들을 척척 해결해 내는 박주임에게 신입 좀 그만 괴롭히라고 할 수 없었다. 그저 영주에게 말로써 작은 위로만 전할 뿐이었다. 작은 파트라 금방 친해질 거라 생각한 건 영주의 큰 착각이었다. 일주일에 세네 번 있는 술회식 또한 쉽지 않았다. 영주가 그나마 믿고 의지하는 선임이 술과 회식을 좋아하다 보니 빠지기도 힘들었다. 늘 함께 저녁을 먹었으며 저녁 먹다 술까지 이어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일이 있거나 몸이 힘든 날 술자리에 빠지면 그다음 날은 박주임의 차가운 시선과 말투들이 가득했다. 업무가 늘어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영주는 술을 너무 마셔 건물 화장실에서 토를 몇 번이나 했는지 그러고 그다음 날 아무렇지 않은 듯 일하는 게 너무나 비이상적으로 느껴졌다. 해장한답시고 영주 의사와는 상관없이 순대국밥집을 가고, 식사든, 간식이든, 취미 활동이든 이 파트는 모든 걸 함께 해야 했다. 일이 일찍 끝났어도 선임, 주임이 퇴근을 안 하면 절대 갈 수가 없었다. 다음 날이 힘들어지기에 영주는 늘 기다렸다.


영주는 신입 교육 때 꿈꿨던 회사 생활과 직장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눈치살이가 따로 없었다. 항상 함께를 강조하지만 함께가 아니었다. 박주임의 기분에 좌지우지되는 영주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용기를 내서 부서 이동을 신청했다. 영주 후임으로 들어온 신입마저 얼마 안 있어서 파트를 옮겼다. 영주가 옮긴 팀은 이전 팀과 분위기가 너무나 달랐다. 칼퇴는 기본이고 나뭇잎 모양의 빛 가리개, 곳곳에 인형들로 부드러운 업무 환경이었다. 팀 분위기도 좋아서 이 팀에서 오래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6개월 뒤 인사이동이 이루어지면서 영주 의사와는 상관없이 선행디자인 팀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디자인 팀의 꽃인 선행 디자인팀으로의 이동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워낙 유명한 팀이다 보니 학벌 스펙이 뛰어난 사람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다. 모이면 학교 얘기에, 동문도 많고 소위 말하는 SKY대, 외국 유명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도 많았다. 상위 대학도 아니고 디자인 전공도 아닌 영주가 낄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영주의 새로운 파트장 역시 학벌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팀장과 미국 대학의 동문이었고 자주 유학시절을 얘기했다.

"영주는 어느 대학 나왔다고?"

"동국대요."

갑자기 주변이 싸해짐을 느끼며 파트장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선행 디자인은 정해진 답이 없으며 여러 사람의 의견으로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언변도 좋아야 하고 설득력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학벌이 좋으면 일단 30프로는 먹고 들어간다고 해야 할까. 디자인 전공이 아닌 컴퓨터공학 전공이며 개발팀에서 이동한 영주의 의견에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았고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러 논문을 조사하고 자신 있게 의견을 내놓았지만 거절당하기 일쑤였고 옆 파트원들의 안타까운 시선도 느껴졌다. 영주가 팀장과 파트장에게 영원한 낙제점을 받은 건 타 부서의 실장님께 보고 하는 중요한 회의에서였다. 영주는 처음 맡은 큰 회의에서 가장 기본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어이없는 실수였다. 첫 큰 회의에 긴장을 했어서 회의가 끝난 후 식사 대접을 하면서 식당 예약 인원을 13명이 아닌 12명으로 한 것이었다.

 "이런 실수를 왜 하는 거야?"

파트장이 이렇게 단순한 걸 왜 실수한 거냐며 화를 내었다. 파트장은 영주가 PT 발표를 하면서 실수를 하면 모르는 척 나 몰라라 휴대폰만 보고 있더니 식사 자리에서도 담당자인 영주를 빼고 식사를 하고 왔다.

"자리가 없으니 저는 따로 먹을게요."

"아휴."

멀리서 팀장님 또한 검지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며 화난 표정이었다.

영주는 식당을 나오며 눈물이 나왔다.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실수를 했을까. 이 회의를 위해 며칠을 야근하며 준비를 했는지 상사에게 보고를 수없이 하며 몇 번을 수정하고 연습을 했는지 생각하며 어쩔 수 없는 바보 같았다. 고급진 저 음식들을 먹을 자격이 없다며 화장실로 들어가 하염없이 울었다.


오후가 되니 파트장이 불렀다. 파트원들이 다 있는 데서,

"영주야. 왜 이렇게 말을 못 해? 연습은 했어? 왜 이렇게 더듬는데. 내가 답답해 죽겠다! 이따 팀장님 오시면 같이 봐야 할 게 있으니 이따가 다시 보자. 휴."

또 한숨을 내쉬는 파트장을 뒤로하고 자리로 돌아가는 데 파트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말도 못 하고 실력도 없는, 인정받기는커녕 도움이 안 되는, 한숨만 나오게 하는 답답한 직원이었다. 잘못은 온전히 영주의 책임이었다. 태어나서 제일 비참했던 하루였다. 함께 회의에 참석했던 같은 팀인 팀장과 파트장 어느 누구도 그래도 수고했다고 위로해 주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영주에게 엄청난 양의 수정작업을 지시하고는 칼퇴를 했다.


밤 11시. 퇴근을 하고 육교를 건너는데 바람마저 너무 찼다.

'이렇게 사는 게 맞을까. 꼭 이렇게 살 수밖에 없을까.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힘들었던 마음만큼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찼다. 엄마, 아빠, 동생들, 친척들에게는 너무나 자랑스러운 딸, 누나, 조카이겠지만 회사 안에 영주는 문제 사원이었다.

겉만 멋진 문제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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