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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나 Nov 30. 2022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결혼 4년 만에 영주에게도 아기천사가 찾아왔다. 그날이 오지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부인과를 찾아갔다가 아기집을 보게 되었다.

'세상에. 내 뱃속에서 아기가 커간다니.'

신기하면서 엄마가 된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임신 7주 차. 어느 때처럼 아기가 잘 자라고 있는지 보려고 산부인과를 갔다. 아침부터 기분 좋게 은행나무 길을 남편과 함께 걸으며 병원으로 향했다. 아기는 얼마나 또 컸을까. 누구를 닮았을까. 아기가 태어나면 이렇게 키워야지. 이름은 어떤 게 좋을까 등 설렘 가득한 이야기들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집에서 병원 가는 길이 이리 짧았을까 싶었다.

초음파로 아기를 보려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한참을 말이 없으시더니 검사만 계속하셨다. 늘 미소 짓는 얼굴에 따스한 말을 자주 건네주시던 선생님에게서 오늘은 이상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아기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네요. 여러 번 봤는데 아무래도 떠나보내실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네? 한 번만 더 검사해 보시면 안 될까요?"

믿기지 않았다. 하혈이나 통증 같은 증상이 없었기에 너무나 충격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났다.

'어떻게 하지.'

멈추지 않는 눈물로 다른 병원을 찾아갔다. 큰 병원에 가면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혹시 선생님이 놓치고 못 본 게 있을 수도 있으니 하는 작은 희망을 떨치기 힘들었다.


"심장소리가 안 들리네요. 유산 맞네요. 수술하셔야 할 것 같아요."

"네..."

혹시나 하는 마지막 작은 희망을 가져보았는데 불안이 현실이 되었다.

다음날, 홀로 수술실로 들어가 누웠는데 차가운 공기와 은빛의 수술도구들이 영주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외롭게 하는 것 같았다. 영주는 일을 좀 줄여서라도 몸과 마음을 좀 튼튼하게 해서 아기를 다시 갖고 싶었다. 너무나 안타까웠기에 더욱 간절했다.


필라테스 강사인 영주는 수업시간에 몸을 많이 쓴다. 수업 시간 내내 서 있기에 오전 오후 수업이 많을 때는 다리가 부어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회원들이 몸이 좋아졌다며 아픈 데가 시원하게 풀렸다고 선생님 덕분이라며 수업을 계속 연장해서 함께 할 때면 몸은 좀 힘들지만 너무 뿌듯하고 보람찼다.

'몸이 피곤해서 아기가 떠나버렸나.'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회원들에게 알려주며 열심히 일을 했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을 줄이면 나중에 회원들이 다시 찾아줄까, 수업을 다시 할 수 있을까 여러 날을 고민하다 계속 이대로 유지한다면 아기가 찾아와도 또 떠날 것 같아서 일을 줄이기로 했다.


다시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천사가 다시 찾아와 주었다.

'이번엔 무조건 지킬 거야.'

병원에서 또 한 번 유산기가 있어 보인다며 당분간은 무리한 일을 하지 말고 쉬는 걸 권장하였다. 아기를 또 잃을까 걱정하다가 결국 일을 잠시 그만뒀다. 영주는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함이 있었지만 일단은 아기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아기는 건강하게 태어났고 1년은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없이 지나갔다. 돌이 지나서 영주에게도 쉬는 시간이 조금씩 생기자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내가 일하면 아기를 누가 돌보지?'


어릴 적 아빠한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영주의 고향인 제주에서 살고 싶다는 남편을 따라 첫 아이가 태어나면서 제주로 옮겼다. 남편은 제주 첫 직장에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육아휴직을 쓰기 힘들었고 시어머님은 멀리 다른 지방에 계시고, 영주 부모님은 일을 하시고 계시기에 아이를 봐달라고 하기가 너무 죄송스러웠다.

'어쩔 수 없네. 내 아이니까 내가 키워야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 6년.

그동안 둘째 아이도 태어났고 첫째는 7살, 둘째는 5살이 되었다. 네 가족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늘 영주의 마음 한편에는 자신의 일을 열정적으로 하던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싶었다. 영주 어머니는 영주가 결혼도 했고 예쁜 딸, 아들이 있으니 잘 키워내는 것만으로도 된 거라고 했지만 영주는 누구의 엄마가 아닌 영주 자신을 찾고 싶었다. 아이들이 아닌 자신을 위해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고 보상도 받으며 사회에서 인정받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빠한테도 실패한 딸이 아닌 누구보다 가치 있는 딸이라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영주는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 있는 시간 동안 매일 곰곰이 생각했다.

'난 무얼 할 수 있을까? 지금 내 자리는 어딜까?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영주는 고민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기분이 축 처질 때면 마음을 비워내 보고자 무작정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잠시 잊기 위해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무작정 따라도 써보고 영주의 생각도 곁들어 쓰면서 글쓰기가 재밌어졌다. 글을 쓰면서 불안했던 마음이 하나 둘 사라지는 만큼 새로운 일에 용기를 내 볼 마음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매일 새벽 신문을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과 나눈 생각들을 글로 쓰게 되었고 아침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이 너무나 좋았다. 겉으로는 그냥 주부, 육아맘, 경단녀이지만 영주 자신은 더 이상 불안해하며 비교당하지 않을 자신만의 단단함이 마음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영주야. 네가 있어서 내가 아이들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일을 할 수 있는 거야. 고마워. 너는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이야. 조급해하지 마."

불안해할 때면 늘 용기를 주던 남편의 말이 힘이 되었다.

'그래. 나 자신 스스로 떳떳하면 그걸로 충분히 가치 있는 거야. 더 이상 남과 비교하며 나 스스로 상처 주지 말자.'


대학생 때만 해도 폼나게 커리어우먼으로 살아갈 거라던 영주는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와 살게 될 것을, 주부로 아이들을 키우며 글을 쓰고 있을 것을 상상조차 못 했다. 지나온 날들을 떠올려 보니 인생은 정말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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