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방울꽃을 보내며
얼마 전 엄마의 기일이었으나, 육아로 인해 내려가보지 못했다. 사실 남편에게 맡기고 가고자 하면 갈 수도 있었으나 그럴 용기를 내지 못했다. 지방까지 거리도 거리였으나, 뚜벅이인 나에게 터미널부터의 이동수단도 마땅치 않았다. 올해는 마음으로 엄마를 기렸고, 그녀의 안녕을 기도했다.
엄마는 아픈 걸 알게 된 후, 갑자기 교회에 가고 싶다고 했다. 어릴 적 언니와 내가 다녔던 동네의 작은 교회. 투병기간 동안 몸과 마음이 힘든 나날이 많았으나, 하나님을 믿으며 엄마가 얻었던 것들도 많았을 것이다. 힘차게 그리고 즐겁게 방에서 찬송가를 부르던 엄마의 모습이 그 증거이다. 다행히 엄마는 성도의 이름으로 천국에 가셨다.
그래서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돌아가신 후 첫 기일에는 교회 목사님께서 신방으로 추모기도를 해주셨다. 그다음 해와 그 다다음해는 가족끼리 엄마를 보러 가서 어리숙하게 우리만의 추모기도를 하고, 찬송을 불렀다. 언니가 결혼하고 처음은 형부도 함께였고, 그랬기에 '형식'을 갖추고 싶었는지 아빠가 내게 기도를 준비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종교가 없는 아빠지만, 항상 엄마의 신앙생활을 응원해 줬다. 아빠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젊었을 땐, 먹고사느라 바빠서 신앙을 가져볼 여유가 없었고, 나이가 들어선 그렇게 살아온 긴 세월 탓에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몇 해를 보냈고, 그 이후엔 거창하게 추모기도까진 아니더라도 외할머니를 모시고 식사하는 형식을 띠게 되었다. 언니가 출산을 한 이후부터 가족이 다 함께 모이지 못하는 때도 있었다. 언니의 출산 후 초반에는 같이 가서 한 명은 엄마를 뵈러, 한 명은 차에서 아이와 함께하는 방식으로 교대하며 다녀오기도 했다. 내가 결혼한 이후에는 외할머니를 모시고 식사를 했고, 그다음에는 각자 스케줄에 맞춰 언니는 언니대로, 나는 나대로, 남편과 따로 다녀오게 되었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각자의 상황에 맞게, 각자의 방식으로 엄마를 추모했다. 나의 경우, 결혼과 출산이라는 변화가 있었지만,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출산 후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은 배가 되었다. 비록 올해는 가보지 못했으나, 다음에 본가에 내려가게 되면 그때 꼭 들러보리라. 내년엔 육아를 핑계삼지 않고 시간을 내어 만나러 가리라. 아이가 크면 함께 가 보리라. 아이에게도 외할머니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다. 살아있었다면 특유의 명랑함으로, 어릴 적 이모 딸들까지 키워낸 육아경험치로, 손주를 이뻐해 줬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이가 커서 화장대에 놓인 엄마의 젊었을 적 사진을 보게 된다면, '이분이 엄마의 엄마, 너에겐 외할머니야.'라고 말해줄 것이다.
앞으로도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글을 써보려고 한다. 엄마를 생각하며 글을 쓰는 게 나에겐 엄마를 기리는 방법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 이젠 우리에게 한 명의 가족이 더 생겼으니, 꼭 함께 손잡고 엄마에게 갈 것이다. '엄마, 손주랑 같이 왔어요.'라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네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