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에서 아프면 서럽다.
최악이다.
몇 시간째 눈물이 그칠 줄을 모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내 상태는 말 그대로 노답이다.
멘탈과 이성적인 생각은 집을 나가버렸다.
그저 눈물과 감정이 폭발한 밤이다.
어제는 임지에 파견된 날.
내 상태는 좋지 않았다.
임지 파견되기 바로 전날 퇴원을 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어로 하는 마지막 발표를 잘 끝마친 후 갑자기 고열에 시달렸다.
다리는 덜덜 떨리고 숨은 안 쉬어졌으며 걸을 수가 없어 주저앉아 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울 틈도 없이 현지 직원의 도움을 받아 산소마스크를 낀 채로 택시를 잡아탔다.
추워서 온몸이 진동하는 것을 정신을 붙들어 매고 진정시키며 병원으로 이동했다.
39.4도의 열을 내리기 위해 간호사들은 링거를 놓으려고 했지만,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혈관을 찾지 못했다.
이것이 고문인가 싶을 정도로 살면서 맞은 수많은 주사 중에 가장 고통스러웠다.
상태가 좋지 않아 그저 바늘일 뿐인데도 살갗을 찢고 뼈를 뚫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짧은 스페인어로 제발 부탁이니까 그만해 달라고 울면서 애원했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야."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혈관을 찾을 때까지 계속 시도했다.
고통스러운 와중에 간호사는 나를 마치 아기처럼 달래주었고 손을 잡아주었다.
눈빛과 맞잡은 손이 따뜻하여 힘든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도 고열의 원인을 몰라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온갖 검사를 끝낸 후 나는 겨우 병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볼리비아까지 와서 입원이라니... 현타가 왔지만, 늦은 시간까지 있어준 현지직원을 보며 감사하고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검사결과는 살모넬라, 그렇게 나는 동기 단원 중 3번째 살모넬라 환자가 되었다.
퇴원 후에도 열이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고산 완벽 적응이었던 나는 사라지고 산소마스크를 써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을 쉬기 힘들어 전기장판을 튼 채 몸을 지지고 누워있어야만 했다.
컨디션이 안 좋으니 바로 힘들어지는 이곳, 라파즈 고산지대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파견 전 날, 마지막 회식이 있었다.
각자 지역으로 흩어져 업무를 해야 하므로 가족 같은 동기들과의 마지막 만찬이었다.
귀하디 귀한 한식, 게다가 삼겹살이 주 메뉴였기에 아파도 마지막 회식은 가고 싶었다.
걸을 힘도 없어 5분 거리를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속은 니글거리고 몸상태가 좋지 않아 사람들이 챙겨준 내 앞접시의 삼겹살을 전부 떠나보내야 했다.
나는 삼겹살 세 점을 겨우 먹고 식사를 접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짐을 싸고 필요한 물건을 사야 했던 상황,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내가 파견될 꼬로이꼬라는 곳은 시골이고 마트는커녕 위생상태가 좋지 않아 고기도 못 사 먹는 곳이었으므로 수도 라파즈에서 수급해야 할 물건들이 꽤 있었다. (지금은 고기를 사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아픈 나를 대신하여 현지 직원이 1년 치 생활 짐을 전부 싸줬고, 대형마트를 간 사람들이 음식 등 필요한 물품을 전부 사다 줬다.
게다가 파견되는 날 이른 아침부터 동기들이 내 짐을 대신 옮겨 차에 실어줬다.
이제 현지적응 교육은 끝나고 각자 임지로 흩어져 모이려면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헤어지기 직전 모두 눈물바다가 되었다.
헤어짐이 슬프기도 했지만, 날 도와준 사람들에게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날 오열하게 만든 한마디.
"민주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돼요. 괜찮은 척하지 말고 도움받아도 돼요. 이곳은 볼리비아고 열악하기 때문에 조금 더 이기적으로 행동해도 돼요, 그래도 돼요."
나는 인복이 많은 사람임이 확실하다.
꼬로이꼬에 가는 길은 4500m의 고산지대를 넘어가야 도착할 수 있다.
차는 좋지 않고 길은 구불구불 험하며 난 아직도 아프지만, 새로운 시작에 조금은 설레는 듯했다.
게다가 라파즈에서 꼬로이꼬로 가는 2시간 30분가량 보이는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우니 행복했다.
험한 길을 헤쳐 앞으로 약 11개월 동안 거주 할 집에 도착했다.
집주인이 놓아주기로 약속한 가구를 옮겨주고 이것저것 설치해 주고 있었다.
문자로는 전부 다 완료 됐다고 했었는데 방금 도착한 책상에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열심히 내가 살 곳을 위해 주시는 모습에 감사했다.
1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무언가를 사러 간다고 나가더니 한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배가 고파 동기 단원과 라면을 끓여 먹으려고 물을 올리는 중이었는데 꽤 오랜 시간 집을 비운 집주인이 갑자기 들어와서는 열쇠를 주고 떠나버렸다.
그리고 받은 메시지의 내용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행 중이라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가야 한다고 통보를 받은 것이다.
당황스러움을 넘어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오늘까지 다 해주기로 분명 약속했었는데 여행이라니...?
가구는 없어도 당장 사는데 문제가 없다지만, 우리 집은 외부 창분에서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였고 바로 앞에는 사람 사는 집이 있었기에 사생활보호가 전혀 되지 않았다.
잠금장치도 허술해서 커튼과 약간의 보수가 필요했다.
그저 시멘트 부스러기들과 차가운 파란 타일이 '고생길로 온 걸 환영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지러운 상황과 시멘트 부스러기들은 둘째치고 몸이 너무 아팠기에 동기단원이 해준 저녁을 먹고 누워 자려고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역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설명할 수 없는 생전 처음 맡는 냄새.
진심으로 토할 것만 같아 그나마 냄새가 덜한 쪽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불편하게 앉았다.
밖에는 개들은 늑대처럼 짖어대지, 역한 냄새는 집안 곳곳에 퍼져있지, 한 숨도 잘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집... 파란 타일 바닥에 파란 벽, 파란 주방까지 너무 차갑다.
이 집에 살겠다고 결정했을 때 집주인은 분명 벽을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주겠다고 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집은 또 너무 넓고 가구는 없어서 목소리가 울리는 게 휑하고, 차갑고, 나는 혼자다.
집에 정이 안 갈 것만 같은 느낌이다.
첫날부터 복잡한 새벽, 화장실 창문을 마주한 순간 소름이 돋아 버렸다.
복도계단을 바라보는 창문이 잠금장치도 없고 심지어는 닫히지도 않는 것이다.
위치가 딱 샤워기 쪽에 있어 거기서 씻었다간 계단을 오르는 각도대로 속이 전부 다 보인다는 것을 이제 알아버렸다.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는 창문 확인도 못하고 낮에 이곳에서 샤워를 했다.
누가 보지는 않았을까 소름이 돋고 무서워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가 오픈 화장실이구나.
툭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창문에 강도의 침입도 너무 쉬워 보였다.
당장 거주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아침 해가 뜨자마자 매니저님께 임시거주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호텔살이에 필요한 약간의 짐을 들고 집에서 쫓기듯이 나갔다.
집이 있는데... 없다. 그리고 아픈 몸...
호텔에는 편하고 냄새도 안나는 침대가 있지만, 휴식은 고사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 같은 느낌에 좌불안석이다.
집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 나의 공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눈물로 깨달아 버렸다.
환상의 콜라보를 자랑하던 와중에 집주인은 며칠 째 연락이 전혀 되지 않고 내 메시지를 읽고는 답장도 없다.
여행 중이라며 갑자기 떠나고 읽씹이라니... 집주인이 원망스럽고 화가 치솟았다.
화장실 창문에 잠금장치를 달고 닫아보려 해도 내가 기술 적으로 할 줄 모르는 건 둘째 치고, 집주인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창문을 건들 수도 없다.
나의 일방적인 메시지만이 채팅방에 쌓였고 이 기분은 마치 안달 난 짝사랑을 하는 느낌이다.
핸드폰 알람이 울릴 때마다 혹시나 하고 달려가는 내 모습에 웃음만 나온다.
나만 답답하지 나만...
그 와중에 스스로 몸하나 챙기지 못하는 이 모든 상황이 다 짐덩어리처럼 무겁다.
날 지극정성으로 챙겨주는 동기들을 보며 감사하면서 미안하고 폐를 끼치는 것 같아 괴롭다.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나의 존재는 짐덩어리일 뿐이다.
컨디션 회복을 위해서라도 자야 하는데 어지러운 생각들 때문에 아주 긴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토로하니 또르르 떨어지던 눈물은 오열을 낳았고 그칠 줄을 모른다.
타지에서 아프면 서럽다는 말이 사무치게 이해되는 밤.
울보 중의 울보가 되어버린 나.
이곳에서 잘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