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팔 수 없는 기억

by 이유나




남자와 나나는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았다.

그는 나나가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상황을 봐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늘 집에 가는 길에 선물을 하나 꼭 사가려고 해서요.”

동그란 눈을 바싹 뜨고 바라보는 나나의 시선이 어색했는지 남자는 살짝 시선을 비켜갔다.

“아내가 오늘… 아니 사실은 며칠 전부터 계속 말하긴 했어요. 그냥 작은 선물 하나면 된다고요. 저도 뭐 제 형편에 비싼 건 어렵죠. 그래도 올해만큼은 좀 더 좋은 걸 사주고 싶더라고요.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오게 되었네요. 참, 내일모레가 저희 결혼 3주년이에요.”




방금 전까지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사람은 사라지고, 어느새 상기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놓는 남자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좋은 결과 있으시면 좋겠어요. 우선 이것부터 작성 부탁드릴게요. 차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은행잎차? 레몬밤차? 아, 로즈메리차 어떠세요. 집중력과 기억력에 도움이 될 거예요.”

“네. 그럼 그걸로 부탁합니다.”

나나는 가벼운 목인사를 건네고 가게 한편으로 걸어갔다.

벽 선반에는 유리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은행잎, 레몬밤, 로즈메리, 말린 귤껍질까지. 그중 로즈메리 병을 꺼내 뚜껑을 열자 은은한 풀 향이 퍼져 나왔다. 나나는 손가락으로 잎 몇 가닥을 집어 작은 찻주전자 속으로 떨어뜨렸다. 전기 포트에서 물이 끓기 시작하며 보글보글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나는 완전히 끓은 물을 천천히 찻주전자에 부었다. 뜨거운 물에 닿은 로즈메리 잎이 살짝 떠오르며 향을 더 진하게 퍼뜨렸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종이의 빈칸을 채워나갔다.

개인적인 신상에 관한 것부터

내가 팔고자 하는 기억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들.

언제, 어디서, 누구와 했던 어떤 기억인지.

그 기억에 대한 나의 감정과 나에게 얼마만큼의 가치인지.

나나가 찻잔을 남자 앞에 내려놓았다.




첫 모금을 마시기도 전에 이미 로즈메리의 향이 그의 코끝에 닿았다.

풀잎이 비에 젖어 향을 내는 것처럼 맑고 차분한 향이었다. 잔을 입술에 가져가자 따뜻한 김이 얼굴을 스쳤다. 첫 모금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쌉쌀하면서도 어딘가 부드러운 맛이 남았고, 삼키고 나자 혀끝에 아주 옅은 단맛이 따라왔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눈을 감았다.

그래.

그날도 우린 이렇게 뜨겁고…

달았지.


재작년 크리스마스이브.

뉴욕 포시즌스 호텔 27층.

결혼 후 맞은 우리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




남자는 눈을 감은 채 잠깐 숨을 멈췄다 다시 내쉬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눈꺼풀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이.

달콤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지만 곧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

나나에게는 익숙한 장면이었다.

“일단은 봐야 알겠지만 잘하면 값을 높게 쳐드릴 수도 있겠어요. 사실 요즘은 이런 류의 기억을 찾는 손님이 많지는 않아요. 아시다시피 고전에 속하잖아요? 하지만 연말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지죠.”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자 그럼 이제 한번 시작해 볼게요. 저 따라오세요.”




남자가 나나의 뒤를 따랐다.

저녁 8시 50분.

이제 십 분 정도 지나면 그날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겠지.

사람들은 말한다.

추출하고 나면 기억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고. 마치 머리에서 통째로 잘라 덜어낸 것처럼. 그래도 괜찮다. 아니 괜찮을 거다. 가장 소중한 기억이긴 하지만 그녀와의 기억은 또 있다. 일단은 이 기억을 팔아서 그녀를 위한 선물을 하자. 이번만큼은 내가 먼저 그녀를 웃게 해주고 싶다.




옆방에는 기존 모델과 최신형 기계, 이렇게 두 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남자는 여기 오기 전 수십 번 넘게 영상을 찾아봤기에 낯설지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나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심호흡을 두세 번 연거푸 내뱉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앉기만 하시면 나머진 다 자동으로 진행되니까 걱정 마시고요."

남자는 나나의 안내대로 보라색 캡슐 안에 있는 의자에 몸을 넣었다. 파묻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두툼한 쿠션이 등을 감싸 안았다. 나나가 캡슐의 뚜껑을 닫자 딸칵하는 소리와 함께 내부 조명이 켜졌다. 캡슐 벽면에서 가느다란 금속 장치들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남자의 머리 주변으로 모였다. 실제로 피부에 닿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은 남자의 두피를 촘촘히 둘러쌌다.




남자의 심장이 갑자기 빨라졌다.

머리 주변에서 미세한 전자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낮은 진동이 캡슐 안을 채웠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남자는 눈을 꼭 감았다.

이제 그날의 밤은 사라진다.

뉴욕의 차가운 겨울 공기,

호텔 창문 너머로 보이던 도시의 불빛,

그녀의 웃음.

모두.

남자는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살짝 움켜쥐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거기까지였다.




어두워졌던 시야가 한순간 완전히 꺼졌다.

캡슐 안을 채우고 있던 낮은 기계음이 멀어지듯 흐려졌다.

몸이 의자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고, 어디까지가 의식이고 어디부터가 꿈인지 구분되지 않는 상태가 이어졌다. 머릿속 깊은 곳을 무언가 스쳐 지나간 것 같았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붙잡을 틈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손님? 저기요, 손님!”

어딘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캡슐 뚜껑 너머로 나나가 보였다.




그녀는 캡슐과 연결된 태블릿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는 뚜껑을 탕탕 두드리며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지…?

머릿속이 아직 흐릿했다.

몸을 움직이려 하자 손끝이 살짝 저린 느낌이 있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캡슐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뚜껑이 열리자마자 나나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뗐다.




“손님… 이거 언제 구매하신 거예요? 기억나세요?”

남자는 멍하니 그녀와 태블릿을 번갈아 바라봤다.

“구매… 라니요? 그게 무슨…”

나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님이 팔려고 한 기억… 그거 가짜예요. 지금 1/3 정도 추출하긴 했는데.”

남자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나는 이미 의미 없어진 퇴근 시간을 확인이라도 하듯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바라봤다.




“자, 여기 보세요. 구매는 작년에 하셨고요. 내용 한번 훑어보니까 ‘퍼펙트 메리지 3년 패키지’네요. 이게 아마 당시에 꽤 많이 팔린 상품일 거예요. 그래서 더 문제인데 수없이 재탕, 삼탕 돼서 여기저기 팔린 기억이죠. 이런 불법 패키지 이용하시면 손님 원래 기억까지 다 뒤죽박죽 될 수 있어요.”

“메리지… 패키지요? 그렇다면 제 결혼식이나 오늘 팔려고 한 기억까지 모두 거짓이라는 말인가요?”

“아마도 그렇겠죠?”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은 열려 있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눈앞의 나나와 태블릿, 캡슐의 기계 장치들, 방 안의 조명이 모두 현실감 없이 붕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고개를 떨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잠깐 망설이던 그녀의 시선이 아직 미처 꺼지지 않은 캡슐의 조작 패널로 옮겨갔다.

“손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나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 조용히 말했다.

“다시 한번 해보죠.”




남자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캡슐의 뚜껑이 닫혔다. 위쪽의 금속 장치들이 다시 움직이며 머리 주변으로 내려왔다. 기계가 이번에도 같은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이번엔 눈을 감지 않았다. 기계음이 귀 옆에서 규칙적으로 울려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잠시 후 기계가 멈추고 남자는 몸을 일으켜 캡슐 밖으로 나왔다. 나나는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 말씀하신 대로 재작년 크리스마스 기억은 일단 모두 추출했습니다. 물론 벌써 기억은 안 나시겠지만요. 그리고 혹시 훼손되지 않은 부분, 그러니까 손님의 진짜 기억이 상태가 괜찮다면 그 부분만 구매 처리될 수도 있고요. 결과 나오기까지는 일주일 정도. 그리고…”




나나는 남자에게 작은 봉투 하나를 건넸다.

“패키지로 구매하신 기억들 전부 여기 데이터 카드에 담아두었어요. 임시로 빼낸 거라 이삼일 안에 다시 넣으면 완전히 복구될 거고요. 댁에 가셔서 남아 있는 진짜 기억 중에 팔 만한 게 있는지 한번 떠올려 보세요. 다시 오실 때는 꼭 예약하시고요. 아, 물론 빼낸 기억 다시 넣는 건 무료로 해드릴게요.”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는 봉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마도… 없을 겁니다.”

“네?”

“제가 팔 만한 그런 기억요. 없을 겁니다. 아마.”

나나에게 말하는 동시에 남자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내가 떠나던 날.

집 안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식탁 위에는 반쯤 식은 커피가 그대로 놓여 있었고, 소파 위에는 그녀가 늘 덮고 있던 담요가 구겨진 채 남아 있었다. 창문 사이로 늦은 오후의 빛이 들어와 거실 바닥을 채우고 있었지만 집 안에는 사람의 온기가 전혀 없던 그날.




남자는 조용히 가게를 떠날 채비를 마쳤다.

“손님.”

나나가 그를 불렀다.

“평범한 기억도 괜찮아요. 아니 좋아요. 그러니까 꼭 대단하거나 특별한 기억이 아니어도 된다는 거죠. 예를 들면 아내분과 별 얘기 아닌 걸로 웃던 기억이라든지, 비 오는 날 우산 하나를 같이 나눠 쓰고 걷던 기억 같은 거요. 오히려 그쪽은 수요가 꾸준하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럼 한번 떠올려 보겠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가게 안으로 스며들었다.

남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걷다 보면 떠오르겠지.

완벽하지 않아도…

그녀와 함께여서 외롭지 않았던 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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