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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기 Apr 23. 2024

아니, 어떻게 그렇게 먹을 수 있어?


오래간만에 칼질할 생각으로 한껏 들뜬 점심시간이었다. 회사 근처에 경양식 가게가 새로 문을 연 것이다. 메뉴는 함박스테이크 하나로 단출했지만, 식당 문밖에 새어 나오는 냄새만큼은 호텔 레스토랑 못지않았다. 나와 동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주문한 음식을 기다렸다. 곧 익숙하고도 정겨운 식탁이 차려졌다. 딸기잼이 발린 모닝빵, 노릇하게 구워진 함박스테이크, 그 위를 포근히 감싼 갈색빛 소스, 동그랗게 빚어진 흰쌀밥. 보기만 해도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극했다. 내 생일마다 가던 경양식집에 온 기분이었다. 그래도 무엇보다 반가운 건 옥수수 수프였다. 옥수수 수프를 좋아해서 부모님 몫까지 다 뺏어먹곤 했었는데. 그리웠던 그 맛이 떠올라 침이 꼴깍 넘어갔다.


따뜻한 수프를 한 입 호록 삼켰다. 그래, 이 맛이다. 나는 신난 표정으로 밥을 크게 떠 수프 접시에 넣었다. 수프에 말아먹는 밥이 또 별미였다. 초등학교 땐 아침마다 인스턴트 수프를 끓여 밥까지 말아먹어야만 등교할 정도다. 추억을 맛볼 생각으로 입맛 다시는 사이 어디선가 기함이 터져 나왔다. 마주 앉은 동료가 나를 보며 화들짝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수프에다 밥을 말아먹을 수가 있어?”

당황한 나는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 여기에 배추김치 척 얹어먹으면 두 그릇도 뚝딱 일만큼 맛있으니 도전해 보라고. 그 말에 동료는 거의 목덜미를 잡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수프는 엄연히 서양식인데, 그걸 어찌 국그릇에 밥 말 듯 먹을 수 있냐는 거였다. 아무리 퓨전 음식이 많다지만 이건 끔찍한 혼종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단숨에 상식 없이 먹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 맛을 아는 지원군이 절실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나 빼고는 수프에 밥을 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동료들 역시 낯선 문명을 마주한 듯 신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정도면 내 식사 방식이 잘못되어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할 분위기였다. 우리 집에선 분명 이렇게 먹었었는데. 괜히 가족들까지 욕먹게 할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기껏 말아둔 밥은 먹지도 못하고 함박스테이크만 깨작깨작 썰었다.


그러나 상황은 곧 뒤집혔다. 나의 상식을 지적했던 동료가 함박스테이크를 으깨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곤 곁들여 나온 채소와 밥까지 한데 모아 소스에 비볐다. 함박 비빔밥이라 불러야 할까 싶은 갈색 뭉텅이를 포크로 푹푹 떠먹었다. 그 모습을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눈썹이 찌그러졌다. 시골 사는 큰아버지가 보셨다면 분명 ‘똥개들 주는 짬밥’이라 한소리 했을 모양새였다. 서양식에도 저런 비빔밥이 있던가? 포크로 먹으면 다 서양식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 내 기준에선 이해할 수 없는 식사 방식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상식 파괴가 아닌가. 다른 동료들도 눈을 동그랗게 뜬 걸 보면 나만 이상하게 느낀 것은 아닐 터였다. 나는 이때다 싶어 반격을 날렸다.

“아니, 어떻게 그걸 다 뒤섞어 먹을 수가 있어?”


상황을 지켜보던 동료 하나가 솔로몬이 되어 우리에게 판결을 내렸다. 서로의 음식을 한입씩 먹어보라는 형벌이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밥상머리를 어지럽힌 죄였다. 나는 못 이긴 척 갈색 비빔밥으로 숟가락을 뻗었다. 비빔밥의 주인은 포크로 먹어야 맛있다며 머쓱한 듯 이야기했다. 나도 수프 밥을 떠가는 그의 숟가락 위로 말없이 김치 한 조각을 얹어주었다. 서로 그렇게나 자부하던 음식이 어떤지 일단 맛이나 보자는 마음이었다. 이상한 비주얼 뒤에 어떤 풍미를 숨기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형벌을 이행하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제멋대로 살고 입맛대로 먹어도 되는 세상 아닌가. 내가 당연하게 여긴다 해서 남들도 그럴 거라 생각하는 것은 세상의 흐름을 역행할 뿐이다. 내 머릿속 상식은 그저 경험이 만들어낸 산물에 불과하다. 모두에게 통하는 이치가 될 수 없다. 수프에 밥을 말아온 사람에게는 그것이 진리고, 스테이크를 으깨먹어 온 사람에겐 그것이 참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분명해진다. 서로의 진리와 참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마주 앉은 이가 쌓아온 특별한 경험들을 무작정 타박하지 않는 여유다. 각자의 제멋과 입맛이 모여 색다른 하모니를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비벼낸 상식은 꽤나 맛있었다. 결국 각자의 접시를 식탁 가운데로 모아 다 같이 나눠먹기에 이르렀다. 모든 그릇이 싹싹 비워졌다. 새로운 상식이 내 머릿속에 더해졌다. 함박스테이크를 으깨어 밥과 비벼 먹어도 맛있다는 것, 낯선 맛도 한번 입안에 넣어보면 예상치 못한 진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식당을 나서자 처음 들어서던 순간처럼 설렘이 느껴졌다. 배 속 가득, 마음속 가득, 저마다의 풍미가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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