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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 Feb 10. 2022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코로나 블루와 내 방의 상관관계

독일에 온 지 만 2년 차, 그동안 이사는 딱 세 번 했다. 공항에 마중 나온 펜팔 친구와 함께 친구의 집에 도착했을 땐 그저 친구 집에 놀러 간 기분으로 마냥 신나기만 했다. 친구 사정으로 한 열흘 정도는 친구가 집에 없기도 했고, 친구의 하메(하우스메이트, 독일어로는 Mitbewohner/in)는 조용한 편이라 독일에 잠깐 한 달 살기를 하러 온 기분이었다. 친구가 집에 다시 돌아오고, 두 명이 한 방에서 지내기는 버겁다는 걸 금방 눈치챈 나는 딱 한 달만 신세를 지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찾아 나섰다.


독일에서 집을 구하는 건 정말 정말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내가 집을 찾던 도시는 독일에서는 제법 큰 도시인 데다가 물가가 비싼 편이라 무엇보다도 예산이 제법 빠듯했다. 교환학생 시절 기숙사를 생각하던 내가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정도 방세로는 택도 없었으니까. 친구 집 근처도 시내에서 멀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도 더 멀어져야 겨우 예산을 맞출 수 있었다. 집 구하는 편지를 백 통은 보낸 것 같다. 그중에 열 통 정도 답장을 받은 것 같은데, 반 이상이 이미 다음 세입자(보통은 Nachmieter/in)를 구했다며 성공을 빈다는 말이었다. Viel Erfolg. 이 말이 얼마나 야속하게 들리던지.


친구 집에서 머문 지 한 달이 지나면 호텔이나 호스텔이라도 들어가야지 하던 참이었다. 한 곳에서 집을 보러 오라고 해서 친구와 함께 찾아갔다. 거실이 아주 크고, 화장실이 아주 작은 집이었다. 살고 있는 집의 주 계약자(Hauptmieter/in) 도 다른 나라에서 왔고, 현재 구직 중이라고 했다. 전 애인과 함께 살다가 헤어져서 같이 살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현재 살고 있는 하메가 방을 하루라도 빨리 빼고 싶어 해서, 나에게 바로 계약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 사람 밑으로 계약하는 운터미테Untermiete였지만, 그 사람의 계약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아서 사실상 3개월 쯔비쉔(zwischen, 일정 기간 동안 잠시 빌리는 방)이었다. 그치만 나중에 집 계약을 연장할 수도 있다며 그때 가 봐야 안다고 했다. 난 선택지가 없었으니 들어가겠다고 했다. 전 세입자와도 상의할 게 많았다. 계약일보다 열흘 일찍 들어가는 대신 열흘 치 방세를 내고, 방에 있던 가구도 내가 사야 했다. 전 세입자에게 한 달 방세(Miete)만큼을 현금으로 주고 나서야 그 사람이 쓰던 열쇠를 받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이사한 방은 9제곱미터였다. 한국 집을 생각하면 아주 작은 방은 아니었지만 락다운을 보내기에는 작은 방이었다. 분명 인터넷 사이트 홍보글에 올린 사진에는 책상이 있었는데, 계약서를 쓰러 간 날 보니 책상은 없었다. 전 세입자가 들고 갔다더라. 옷장과 침대(+매트리스 받침, 매트리스)만 남아 있었다. 그래도 방이 생겼다는 기쁨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중고 거래 사이트를 통해 필요한 것들을 모았다. 책상에 칼로 이름이 새겨진, 조립이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이케아 책상을 10유로에 샀다. 차가 있는 친구가 집까지 옮겨 줬으니 배송비는 떡볶이와 잡채로 퉁쳤다. 매일같이 사이트를 뒤져가면서 쓰레기통, 세탁바구니, 옷걸이 같은 걸 무료로 얻어왔다. 공공 자전거를 타고 옆동네까지 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땐 그랬다. 집에서 먼 이케아까지 가는 교통비가 아까웠고(왕복 7유로, 약 만 원 정도 하니 비싸긴 하다), 얼마나 머물지도 모르는 방에 새 가구를 사는 것도 아깝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락다운이 길어졌다. 마트와 주유소, 미용실 같은 필수 영업 시설을 제외한 모든 식당과 상점이 문을 닫았다. 생각해보니 이케아를 가려고 해도 못 갔겠다. 락다운이라 죄다 문을 닫아서 이불이랑 베개도 겨우 인터넷으로 주문했었다. 어학원 수업도 온라인으로 전환됐다. 안 그래도 사람 사귀는 거 잘 못 하는데, 그 흔한 어학원 친구마저 만들기 어려웠다. 저녁엔 밥을 먹으면서 유튜브를 봤다. 그 때라도 한국어를 듣지 않으면 너무 적적할 것 같았다. 어학원의 집중코스는 생각보다 바쁘게 굴러가서 체력적으로 지치기도 했다. 만날 친구도 없고, 나가도 할 게 없으니 집에만 있었다. 하루는 하메가 너는 대체 그 작은 방에서 뭘 하느냐고 물었다. 숙제하느라 바쁘고 한국 드라마를 본다고 둘러댔다. 독일어 공부는 좋은 핑곗거리였다.


그 방은 건물 복도 쪽으로 창문이 나 있어서 햇빛이 들어오기 힘들고, 보이는 것도 맞은편 건물뿐이었다. 하필이면 또 계단 바로 옆집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아 거의 늘 블라인드를 치고 지냈다. 그러다 날이 좀 따뜻해질 무렵부터 창밖으로 보이는 깡마른 나뭇가지에 꽃망울이 달리는 게 보였다. 내 방의 시간은 멈춘 것 같아도 세상은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다. 긴 겨울 끝에 마주한 파란 하늘과 풍성하게도 핀 겹벚꽃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때 사실 한국에 돌아가야 하나 정말 많이 고민했다. 독일어 공부하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닌데. 이렇게 방에 콕 박혀 있으려고 여기에 있는 건가? 한국에 있는 내 주변 사람들의 기쁜 일을 함께 축하해 주지 못하는 것보다, 슬픈 일을 함께 나눌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작은 절망감이 있었다. 딱 방의 크기만큼만 작아진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 내 마음까지 작아졌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차마 표현하지 못한 쓸쓸한 봄이었다.


결국 집 재계약은 없던 일이 되었고, 하메도 나도 집을 비워야 하는 상황이 왔다. 부동산을 통해 계약한 집이라서 하루는 부동산 직원과 함께 다섯 팀 정도가 집을 보고 갔다. 대부분은 커플이었고, 한 팀 정도가 친구 사이라고 본인들을 소개했다. 낯선 사람들이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와 (독일식 문화인 것 같다) 이 방은 너무 작다고 얘기하는 걸 듣고 있자니 어딘가 울적해졌다. 나는 하메의 권유로 거실에 함께 앉아 있었는데, 거실에서 방 너머로 언뜻 보이는 하메의 방이 그날따라 몹시 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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