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지식보다 깊은 질문(1)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빠져 난처한 상황에 처하곤 한다.
하루는 둘째 아이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였다.
엘리베이터를 두리번거리던 아이가 숫자가 바뀌는 빨간 불빛이 신기했던지, 화살표와 숫자들을 한참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작은 손가락을 쭉 뻗어 숫자를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아빠! 이건 뭐야?”
엘리베이터가 현재 있는 층과 이동 방향을 알려주는 디스플레이.
살면서 단 한 번도 그것에 대해 궁금증을 품어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단어들을 헤집어 본 후에야, 적당한 단어를 골라 내뱉었다.
“아, 이건 LED 디스플레이야.”
“에리디 디스쁘리?”
“응. LED 디스플레이.”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아이에게 부정확한 명칭과 함께 낭만마저 없는 대답을 내뱉고 말았다.
나중에서야 찾아보니, 그 장치의 공식 명칭은 ‘엘리베이터 층 표시기’였다.
정말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인 이름이었지만,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본 명칭이었다.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생명체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것이 처음인 아이들은 질문을 통해 자신의 ‘처음’을 해소해 나간다.
아이들은 자신의 궁금증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특별한 존재이다.
질문을 통해 어떻게든 자신의 벽을 넘어 더 크고 새로운 세상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려 한다.
내가 ‘엘리베이터 층 표시기’라는 명칭을 처음 들어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엘리베이터가 아직 흔치 않았기 때문에,
그 장치를 마주치지 못한 채로 모든 것에 궁금증을 품는 이 특별한 시기를 흘려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궁금증이나 의문이 생긴다는 것은 세상의 끝과 마주한 것과 같다.
거대한 벽이 기존의 세상을 둘러싸고 있고, 벽 안의 존재는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는 범위가 벽 안의 세상으로 제한된다.
기존의 세상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지만, 벽 너머는 아직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벽을 넘어서기 위해선 새로운 행동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질문’이다.
질문은 새로운 세계,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하기 위한 도전적이고 용기 있는 결단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는,
교육학을 배우는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다.
그의 ‘인지 발달 이론’은 학습이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 방법과 평가에 이르기까지, 교육에 대한 직접적인 지침을 제공해 준다.
나이에 따라 인간의 인지 능력이 어떻게 발달하는지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그의 이론이 없었다면, 우리는 유아기의 아이에게 가설과 추상적 사고를 가르치는 우를 범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이론은 현대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아이들은 ‘인지적 불평형(cognitive disequilibrium)’이라는 학습과 발달의 원동력을 지니고 있다.
인지적 불평형이란, 간단히 말해 ‘내가 가진 이해(도식, schema)가 새 경험을 설명하지 못해 마음이 뒤흔들리는 상태’를 뜻한다.
아동은 기존 도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만나면 불평형 상태에 들어가고, 동화–조절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도식을 형성한다.
이때 아이들이 보이는 대표적인 행동이 바로 “왜? 왜?” 하는 질문의 폭격이다.
아이들은 질문을 통해 자신의 이해를 넓히고, 이로 인해 인지 능력이 발달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이 마주한 벽을 불편한 마음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질문이라는 행위를 통해 그 벽을 넘음으로써, 인지 능력이 확장되기 시작한다.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는 것이다.
우리 눈앞에 놓이는 벽은 그 형태와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그 벽에는 내가 몰랐던 단어가 쓰여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 이론이 적혀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이전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사건 자체가 벽이 될 수도 있다.
그 벽이 주는 불편함을 넘어서지 않고 기존의 세계로 돌아간다면, 나의 세상은 더 이상 확장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교육은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생각할 여지를 만들어, 배우는 이로 하여금 물음표가 떠오를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전에 알고 있던 개념을 일부러 흔들어 주거나,
답을 주지 않은 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방식은 그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열은 뜨거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른다’는 개념을 알고 있는 학생들에게
재미있는 실험을 보여줄 수 있다.
비커 두 개에 푸른색(차가운) 물과 붉은색(뜨거운) 물을 각각 넣고, 투명한 칸막이로 나눠둔 뒤 수면이 맞닿도록 겹쳐 놓는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칸막이를 빼는 순간 붉은색 물이 차가운 물 쪽으로 이동하여 색이 섞이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결과는 그와 다르다.
뜨거운 붉은 물은 위로 올라와 붉은 층을 만들고, 차가운 푸른 물은 아래로 내려가 푸른 층을 만든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층 사이에서 소용돌이 모양의 흐름이 생기며 색이 서서히 뒤섞인다.
즉, 물은 한 방향으로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양방향으로 흐르며 섞이는 것이다.
"왜?", "어떻게?"라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 질문은 ‘열의 이동’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
‘밀도’와 ‘대류 현상’, 나아가 ‘분자의 운동 에너지’라는 더 큰 세상으로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배우는 이의 자세 또한 중요하다.
유아기의 인간은 배움의 존재로서, 질문이라는 도구를 통해 배움의 본능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은 매 순간 새로운 벽을 넘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다.
하지만 자라나기 시작한 인간은 점점 질문이 사라져 간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그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넓어진 세상에 만족하며 흐려져 간다. 더 이상 그들을 둘러싼 벽이 불편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불편함’에 대한 인식은 언제나 ‘개선’을 동반한다. 인류 역사 속의 어떤 발명도, 사회의 어떤 변화도 그 구성원들이 느낀 불편함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우리의 배움도 마찬가지다.
인지 능력의 발달, 사고의 확장, 인식의 변화를 가로막는 이러한 벽의 존재를 불편하게 느끼지 않는 순간, 우리는 존재의 재편과 변화의 원동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배움의 존재는, 눈앞의 벽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왜?”, “어떻게?”라는 물음이 우리의 삶에 동행해야만, 우리는 더 큰 세상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늘도 나아지는 인간은 여전히 물음을 던지고, 손을 들고 질문한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무엇이 나와 우리의 삶을 비옥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그러니, 수업 종료 5분을 남긴 시간, 질문을 위해 손을 든 이에게 매서운 눈초리를 보내지 않도록 하자.
그 사람은 누구보다 배움의 존재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사람이며,
나아가 인류의 변화를 이끌어나갈,
세상을 확장시키는 사람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