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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진화, 문명의 기원

by 더블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편 8:3-5



태초의 우주는, 말이 없었다. 빛도, 어둠도, 의미도 없었다. 단지 존재하는 것들만이 있었고, 그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은 없었다.

코스모스는 그 자체로 무한하고 질서 정연했지만, 어찌보면 그 존재에 의미따윈 없었다. 우주는 끝없이 팽창했고, 별의 심장에선 새로운 물질들이 만들어졌으며, 중력의 소용돌이는 천체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들은 아무도 관찰하지 않는 무대 위에서 일어난 무음의 연극에 불과했다.




약 45억 년 전, 태양계가 형성되며 우주의 작은 미아가 될 뻔한 암석 조각들이 원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며 합쳐지기 시작했다. 아직은 작은 미행성에 불과했던 지구는, 탈출하는 대기를 붙잡을 힘도, 태양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에너지를 견딜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충돌과 병합을 거치며, 지구는 말 그대로 '성장'의 과정을 거쳤다.

모든 것을 파괴할 듯한 거대한 충돌들을 견뎌내며, 지구는 점차 놀라운 가능성의 행성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깊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생명의 씨앗을 품어냈다. 지구의 성장통이 선사해 준 놀라운 결실이었다.


생명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다양해졌다. 태초의 한 빛이 팽창해 가는 우주 속, 수많은 별들이 되어간 것처럼, 생명도 밤하늘 무수히 많은 별들과 같이 그 수를 늘려갔다.

태초의 지구는 요란하고 뜨거웠던 성장기와는 달리, 생명이 싹트기 시작하자 놀라울 정도로 고요하고 평온한 시기를 맞이했다. 아이를 품기 시작한 어머니처럼, 생명을 품게 된 지구는, 그 이후 단 한 번도 자신이 품은 생명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구는 어찌 보면 공허한 행성이었다. 광활한 산맥은 높이 솟아 있었지만 메아리는 없었고, 바다는 깊고 조용하게 차분함을 유지했으며, 별들은 밤하늘을 수놓았으나 그것을 이름 붙일 존재는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주 먼 원시의 밤, 나무에서 내려온 한 보잘것없는 생명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 별빛이 깃들었고, 그때 처음으로 코스모스는 누군가에게 ‘관측’되었다. 어쩌면 코스모스는 그 찬란한 탄생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 생명은 자신의 눈 안에 담긴 감동을 소리 높여 외쳤을지도 모른다. 저곳이 우리의 본향이라고...

처음으로 존재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 생명이 스스로를 인식했을 때, 우주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셈이었다.

그 이후, 산맥의 높은 곳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아닌 대화와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했다. 바다에는 나무들이 ‘배’라는 형태로 가공되어 떠다니기 시작했고, 별들에게는 이름이 생겨났다.
지구 곳곳에 발자취를 남기게 된 이 종의 이름은,

바로 인간이다.




지구의 시간 속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은 하나의 커다란 변곡점이었다. 한때 지구를 지배했던 생물들의 종은 다양했지만 이토록 지구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했던 생물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작은 보잘것없었다. 나무에서 내려온 유인원은 생존해야 했고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해야만 했다.

짐승들은 발톱을 날카롭게 벼리고, 송곳니를 발달시키며 사냥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다. 새들은 창공에서의 삶을 위해 커다란 날개를 펼쳤으며, 어떤 종은 더 크거나 더 작은 몸집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에 적응해 갔다. 나무는 뿌리를 깊이 내려 단단한 대지와 하나가 되어 초록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뇌를 선택했다.

그 유인원들은 자신의 커진 뇌용량을 이용하여 호모속(homo, 인간종)으로 진화했고, 그중에서도 호모 사피엔스는 유별났다.

약 7만~5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유럽, 아시아로 호모 사피엔스가 확산되기 시작하던 시점. 그 이전에도 고인류들은 도구를 만들고 불을 사용했지만, 이 시점부터 호모 사피엔스는 무언가 다른 정신적 작용을 시작하게 된다. 유발 하라리는 이를 '인지혁명'이라고 칭했다.
이전의 호모속은 실용적 언어를 사용했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상징과 문법, 추상어를 사용하는 언어를 발전시켰다. 이 언어는 단순히 “먹이 있어”가 아니라, “저기 있는 큰 동굴 뒤의 바위 밑에, 지난주처럼 토끼 무리가 모여들 가능성이 있어” 같은 미래 예측과 기억 공유가 가능했다.
이는 곧 협력의 확장을 가능케 했다. 소수의 혈연 집단이 아닌, 100~150명 규모의 집단 조직을 가능하게 했고, 신뢰와 역할 분담, 전술적 사냥, 공동 육아 등 복잡한 사회 구조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인지혁명의 진정한 핵심은 실존적 언어가 아닌 ‘허구와 상상’에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인간을 ‘허구를 믿는 생명체’로, 문명의 창조자로 만든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들의 허구를 말하는 능력을 통해 신화, 종교, 부족 정체성, 조상 숭배 같은 집단적 믿음으로 그들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이는 수십 명이 아니라 수백, 수천 명의 ‘가상의 공동체’를 조직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졌다.
상상을 시작한 호모 사피엔스는 처음으로 ‘내일’을 생각하는 능력, 즉 계획성을 획득했다. 다른 호모속을 포함한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움직이지만, 인지혁명 이후의 호모 사피앤스는 예상, 예비, 구조화된 노동을 통해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인지혁명을 통해 호모 사피엔스는 ‘환경에 적응’하는 수준을 넘어, 환경을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존재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정치, 예술, 종교, 과학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기억, 기록, 계승, 발전이라는 문명의 기초적 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처음 던진 순간이 바로 인지혁명의 결과였다.




인지혁명은 생물학적 사건이자, 존재론적 전환이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 순간부터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의식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호모 사피엔스는 코스모스를 바라보는 존재가 된 것이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며 거대한 짐승의 척추를 상상하거나 여신의 젖가슴에서 나온 모유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늘 같은 자리에 떠있는 별을 기준으로 밤하늘 떠있는 별들에 그림을 그리고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생물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영혼을 상상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 순간부터 자연을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우주의 일부로만 느끼지 않고, 우주를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인지혁명은 언어의 진화, 사회적 협력, 상징과 허구의 창조, 시간과 미래의 인식을 통해 인간을 생물학적 동물에서 문명을 만드는 존재로 전환시켰다.
그 결과,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묻고, 우주를 바라보며 질문하고, 결국 코스모스를 해석하는 유일한 생명체로 거듭났다.




인지혁명을 통해 거대해진 공동체는 수렵 채집 생활에 종말을 고했다. 공동체가 거대해진 만큼 이주에 어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존이 위협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연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자연을 활용할 줄 아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곧 자원이 되었다.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얻은 하늘의 질서는 그들을 밭으로 이끌었고 그곳에 씨를 뿌리게 만들었다. 밭에 뿌린 씨앗은 이윽고 문명의 씨앗이 되었다.

자연의 조화 속에서 질서의 감각을, 시간의 흐름을, 우주의 율동을 읽어내고자 했던 하나의 작은 생명.
그 생명은 이전에 없던 것을 이룩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자기 자신 외의 ‘무언가’를 잉태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문명이었다.




우리 인간은 왜 하늘을 바라보는가?
허기 때문이 아니다. 생존 때문도 아니다. 하늘에 음식이 있는 것도, 포식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언제나 하늘을 바라봤다. 고개를 들고, 별을 세며, 이름을 붙이고, 궤도를 계산했다.
우리가 하늘을 바라본 건, 그 너머에 무언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너머를 꿈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짐승은 환경에 적응하지만, 인간은 환경에 질문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무엇이 존재를 가능케 하는가?
인간은 존재에 대해 묻는 유일한 생명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곧 우주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러니 문명은 곧 코스모스를 향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문명이란 곧 기억하고, 해석하고, 남기려는 노력이며, 동굴의 벽에 새겨진 손바닥 자국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 있었다”는 선언이었고, 별자리의 이름은 “우리는 세상을 보는 존재이다”라는 선언이었다.
결국 문명은 도구나 농업, 도시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 인간은 패턴을 읽고, 질서를 찾아내고, 시간 속에서 의미를 붙잡으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천문학의 시작이었고, 종교의 시작이었으며, 예술의 기원이었다.

우리는 코스모스를 관찰하며 시간을 배웠다. 별의 주기에 따라 계절을 알았고, 농사를 지었고, 사회를 구성했다. 코스모스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과 관계 맺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이 문명이다.

우리는 왜 문명을 만들었을까?
왜 인간은 언어를 만들고, 수를 세고, 돌을 쌓아 별에 닿으려 했을까?

혹여 코스모스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시도는 아니었을까.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거대한 우주의 침묵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 두려움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신화를 만들고, 수학을 만들고, 법을 만들었다.
모든 문명의 기저에는 “영원하지 않음”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인식을 견디기 위한 ‘형식’이 바로 문명이었다.

그러니, 문명은 코스모스에 대한 반응이었고, 우주를 향한 염원이었다.
우리는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려 했고, 그 질서를 따라 삶을 설계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 ‘역사’를 만들었고,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을,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을 만들었다.
다르게 말하면, 문명은 인간이 코스모스를 이해하고자 했던 하나의 언어였고, 코스모스는 인간이 문명을 만들 수 있게 한 원초적 질문이었다.




인간은 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그 위대한 질문이야말로,
모든 학문과 문명의 시작이었으며,
인류 진화의 가장 위대한 결실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시작된 순간, 인간과 문명은 찬란한 코스모스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였으니,

인류가 코스모스를 향한 향해의 돛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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