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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코스모스를 닮은 사회

by 더블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시편 19:1-4



코스모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을 올려다보는 눈이 존재했고, 그 신비를 헤아려보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문명의 출현과 함께 인간은 코스모스를 향한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별을 ‘그저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었다. 관측하고, 기록하며,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화 속에서 인간에게 지혜와 지식을 전해주는 존재는 늘 신적인 존재였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는, 인류에게 ‘불’이라는 문명의 도구를 선물한 존재가 티탄족 프로메테우스였다.


그러나 진정으로 인간에게 지식과 지혜를 선사한 최초의 교과서는 바로 밤하늘이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들의 규칙을 읽어내고, 달의 주기를 기억하고, 태양의 길이를 계산했다. 그것은 생존의 도구인 동시에, 존재의 불안을 다독이는 언어였다. 문명은 기술보다 먼저, 의미를 해석하려는 시선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은 자연을 바라보았고, 그 안에서 리듬을 보았다. 그 리듬은 곧 시간의 탄생이 되었고, 시간은 삶의 구조가 되었으며, 구조는 공동체의 질서를 가능케 했다. 문명은 그렇게, 자연의 '이해'를 바탕으로 세워졌다.




인류는 오랜 세월 떠돌이 삶을 살아왔다. 비약적인 뇌의 진화는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하게 해 주었고,
의사소통과 협력을 통해 공동체를 이루게 했지만,
아직 자연이 주는 더 큰 선물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며 유목적인 삶을 살았다. 자연의 리듬에 따라 이동했고, 계절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다 기원전 1만 년경, 기후가 점차 안정되면서 인간은 자연의 주기에 따라 씨를 뿌리고 열매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농경은 단지 식량 확보 방식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처음으로 자연의 시간을 인식하고, 순응하고, 구조화하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태양이 지는 시간, 달의 모양, 별자리의 이동. 이 모든 것은 시간의 질서를 가르쳐주는 교과서였다. 인간은 이 리듬을 따라 달력을 만들고, 절기를 나누었으며, 제사와 축제를 계획했다.

이러한 시간 인식은 공동체의 통합을 가능하게 했고, 정착과 분업, 축적과 분배, 책임과 통치라는 새로운 사회적 구조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결국 문명은 하늘로부터 배운 시간의 언어를 바탕으로 조직된 사회의 형식이었다.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얻은 지식은 농업과 정착의 기초가 되었고, 그 농업은 곧 문명의 불씨가 되었다.

그리고 그 불씨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오늘날도 그러하지만, 농경 사회 위주의 초기 문명에게 시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그들의 삶 그 자체였던 농사는 직감이나 어림짐작으론 절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문명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문명의 생존은 전적으로 코스모스의 규칙적인 운행과 그 질서에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천문학은 농업의 언어가 되었고,
농업은 공동체의 언어가 되었으며,
공동체는 곧 문명의 초석이 되었다.


농업혁명의 발상지라 여겨지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건설된 고대 문명 메소포타미아. 그곳의 인류가 성공적으로 농작물을 길러낸 배경엔 코스모스를 바라보던 그들의 선조가 있었다.
기원전 2000년경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들에는 달의 위상, 해의 움직임, 별자리 위치를 기록한 증거가 남아있다. 그들은 음력 기반 달력 사용 하였는데 별자리, 특히 황도대의 12궁을 기준으로 1년의 흐름을 파악했다.
기원전 7세기에 작성된 그들의 'Mul.Apin 천문 목록'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바빌로니아의 천문학 체계 정리를 바탕으로 하며, 계절, 날씨, 시간, 별자리를 하나의 구조 안에 통합한 최초의 과학적 문서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이집트인들은 시리우스 달력이라는 독창적인 달력을 사용했다. 그들은 밝게 빛나는 별인 시리우스(Sirius)가 태양과 함께 떠오르는 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삼았다.
그들은 별을 기준으로 1년을 365일로 고정하였으며 시리우스가 태양과 함께 떠오르는 '헬리아컬 라이징(heliacal rising)'은 나일강의 범람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러한 코스모스의 질서는 그들에게 농사를 시작해도 된다고 알려주는 하늘의 신호와도 같았다.
코스모스는 그들에게 영감의 존재였다.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 아부심벨 신전 등은 해의 위치에 따라 구조가 배치되었고, 오벨리스크의 그림자나 주기적 태양 정렬을 통해 코스모스가 선물해 준 시간의 감각을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고대 중국에선 달의 주기와 24 절기를 기반으로 한 달력을 사용했다. 고대 중국의 문자인 갑골문(甲骨文)에 기록에서는 일식, 월식, 절기, 점괘 등에서 그들의 시간 의식이 분명히 드러난다. “상제(上帝)”의 뜻을 묻는 제사 날짜는 코스모스의 천문 주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바다 건너 마야 문명에서는 하루 단위로 날짜를 계산하는 '장기력'을 발명했다. ‘킨(1일)’, ‘운알(20일)’, ‘툰(360일)’, ‘카툰(7,200일)’, ‘박툰(144,000일)’ 등 복합적인 시간 계층 사용했는데, 그들의 고도화된 시간 체계 안에는 천문학과 의례, 정치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마야 문명의 유적인 치첸이차, 코판, 팔렌케 등에서 발견된 천문관측소, 제례 주기, 왕조 연표가 새겨진 비문들은 보고 있자면, 그들이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시간체계와 코스모스 안에 숨겨진 수학을 터득했음을 알 수 있다.




문명은 하늘의 질서를 단지 농업을 위한 시간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권력과 통치마저 코스모스의 메타포로 설계했고, 군주는 자신을 우주 질서의 대변인으로 선언했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북극성은 하늘의 축이자 영구불변의 중심으로 여겨졌다. 자금성과 고대 수도들은 북극성을 기준으로 정확히 남북축을 설정하고, 성곽과 도로를 정방형 격자로 배열해 “지상의 천상(天象)”을 구현했다.
황제는 “하늘의 아들(天子)”로서 하늘의 주기를 인간 사회에 적용했다. 즉위식·조정·제례를 24 절기와 천문 현상에 맞추어 거행했으며, 일식·혜성 출현은 곧 천명이 흔들리는 정치적 위기로 해석되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태양신 ‘라’의 현신으로, 새벽과 황혼에 태양과 함께 부활한다는 신화를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사용했다.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오리온자리(오시리스)와 북극성을 향해 배치되어 왕의 영혼이 사후에 별의 길을 따라 상승하도록 설계되었다.
‘마아트’(우주적 질서)는 파라오가 유지해야 할 정의였고, 조세·법·축제 달력은 모두 나일강 범람과 시리우스의 주기에 맞추어 편제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그우라트는 천계와 지계를 잇는 계단식 산으로 설계되어, 위층일수록 신에게 가까워진다는 위계를 시각화했다.
또한 함무라비 법전 서문에는 태양신 샤마시가 왕에게 법을 수여하는 부조가 새겨져, 왕권이 “하늘의 법”에서 유래했음을 선전했다.
바빌로니아 왕들은 점성술 학파(슐투쿠)로부터 일식·행성 배치를 보고받아 정복전쟁이나 대규모 공사를 결정하기도 했다.

마야 왕들은 자신을 “카웨일(하늘 괴수)의 후예”로 칭하며 금성의 공전 주기에 따라 즉위식을 거행했다.
치첸이차의 쿠쿨칸 피라미드는 춘·추분에 뱀 모양의 태양빛이 내려오도록 설계돼 왕의 권위를 우주적 순환에 맞춰 시각화했다.
스텔레(비석)에는 장기 달력 날짜와 함께 왕의 피를 바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를 통해 마야 문명은 왕의 피가 우주 갱신의 제물이 되는 것임을 천명했다.

잉카문명의 수도 쿠스코는 세케(방사형) 성지 체계를 통해 하늘 별자리와 지상의 성역을 연결했고, 그들의 성지 코리칸차(태양의 사원)는 금으로 벽을 입혀 새벽 햇살이 도시 전체를 비추게 하여, 왕권이 태양에서 발현됨을 상징적으로 그들의 시민에게 주입했다.
고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는 메루산 5봉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탑과, 해자를 둘러싼 우주 바다 설계를 통해 그들의 왕이 “우주의 중재자”임을 건축으로 표현했다.


이 외에도 모든 문명에서 그들의 정치와 사회의 모습은 코스모스의 질서와 그 절대성을 따라가고자 했다. 고대 문명의 왕권은 “질서를 재현·유지한다”는 우주적 사명을 근거로 정당성을 확보했다. 정치 구조는 하늘의 계층·주기·방향성을 모방했고, 왕은 그 질서를 인간 세계에 투사하는 우주적 관리자가 되었다.




코스모스의 질서는 인간에게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변치 않는 코스모스의 절대성은 불멸을 염원하는 그들의 문명에 선명한 영감을 주었다.
도시는 단지 거주지의 집합이 아니었다. 거대한 신전, 축제의 주기, 달력과 관측소, 이 모든 것은 자연의 구조를 지상에 복제하려는 시도였다.

문명은 지상에 건축한 축소 우주였다. 신전은 하늘의 극점을 겨냥해 세워졌고, 왕권은 별의 순환처럼 재가동되었으며, 일상의 호흡마저 계절의 율동을 따랐다.
인간은 문명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곧 코스모스를 흉내 낸 결과였다. 문명은 자연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자연을 반영하고 응답하려는 형식적 몸짓이었다.

그러니 문명의 기원은 도구나 농업의 시작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문명의 탄생을 야기한 것은 인간의 의식이었고 질문이었다.
"우리는 왜 시간을 느끼는가", "왜 계절을 기억하는가", "왜 별을 따라 길을 정했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코스모스를 지상에 건설하려는 시도로 이어진 것이다. 그 모든 질문의 이면에는 자연을 이해하고 싶다는 열망, 그리고 그 질서를 따라 삶을 구조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문명은 곧 인간이 우주의 메세지에 응답한 방식이었다.

코스모스, 그것은 인간에게 하나의 언어가 되었고, 신앙이 되었으며, 문명의 구조가 되었다.


결국, 문명은 인간이 만든 '또 하나의 코스모스'였다.


별을 향한 눈동자는 사회의 구조가 되었고, 문명은 그 조화로움을 닮으려는 노력의 결정체였다.
코스모스를 향한 시선은 지상에 ‘또 다른 코스모스’를 세우려는 꿈으로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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