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4) 권위의 그늘

by 더블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시간이 흘렀다. 문명은 점점 더 커져만 갔고, 각자의 독특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강가에 모였던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고, 흙벽으로 쌓은 성을 지나 하늘 높이 탑을 올렸다. 계절을 노래하던 입술은 이제 법을 읊었고, 별자리를 따르던 손은 인간의 질서를 그리기 시작했다. 문명은 마치 성장하는 아이처럼 하늘을 향해 팽창하며,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문명은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성숙해진 문명의 이면에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특이점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중세 유럽, 그곳은 더 이상 하늘을 자유롭게 올려다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높은 성벽과 교회의 첨탑은 시야를 가렸고, 진리를 묻는 입은 ‘이단’이라는 불꽃 속으로 사라졌다. 사제는 말했고, 왕은 명령했다. 자연은 이제 신의 뜻이 담긴 책 속 문장이 되었고, 그 책을 읽는 자만이 ‘그들 스스로 정한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이 결탁된 권위 구조는 사회 내부의 결속력을 서서히 약화시켰다. 성직자의 해석과 영주의 명령이 곧 절대 규범이 되는 체계 속에서, 평민은 스스로의 삶을 설명할 언어를 박탈당했고, 공동체적 의사 결정은 ‘위’로부터의 하달로 대체되었다. 결과적으로 마을과 길드, 신앙 공동체는 외부 억압을 피해 폐쇄적으로 수축했으며, 상호 신뢰보다는 배타적 생존 전략이 우선시 되었다.

교회와 왕권만을 위했던 제도는 계층 간 격차를 심화시켰다. 십일조, 면죄부, 세금, 부역 의무 등은 농민과 도시에 갓 진입한 장인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웠고, 그 부담은 다시 문맹과 빈곤의 악순환을 낳았다. 성직자와 귀족이 독점한 라틴어와 법률 지식은 성장 사다리를 끊어 놓았고, 무지는 통치 가능성을 담보하는 편리한 틈새로 기능했다.

나아가 이단 심문과 마녀사냥은 사회 내부의 불만과 공포를 ‘타자화’하여 해소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갑작스러운 흑사병이나 기근의 원인은 종종 신앙의 순수성을 의심받는 집단에게 전가되면서, 공동체적 연대는 더욱 파편화되었다. 서로를 감시하고 밀고해야 생존할 수 있는 구조는 화합과 공존의 토대를 침식시켰다.


이렇듯 중세 유럽의 신정적 정치 구조는 ‘하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놓여 있던 조화의 삼각형을 무너뜨렸다. 인간이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느꼈던 경외는,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공포와 복종의 서사로 재편되었고, 그 결과 문명은 본래 모방하고자 했던 우주의 균형으로부터 한 걸음 더 멀어졌다.

코스모스는 여전히 질서를 따랐고 별은 변함없이 떠 있었지만, 그 움직임을 기록하던 이들은 숨을 죽여야 했다. 자연은 우리에게 언어가 아닌, 존재의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냈지만 그 침묵은 종종 기득권층의 권위에 복무하는 언어로 왜곡되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지구가 우주의 중앙이라는 교의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의 지동설은 단순한 천문학적 혁신이 아니었다. ‘인간이 창조 질서의 정점’이라는 신학·철학적 전제를 뿌리째 뒤흔든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원고가 신-인간-우주로 이어지는 위계적 도식을 붕괴시킬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사후(死後)에 가까운 시점까지 묵혀 두었고, 최종 인쇄본의 서문에는 교회 검열관이 덧붙인 “가상의 수학적 모형”이라는 단서가 삽입되었다. 과학적 사유뿐 아니라 인간 스스로를 주체로 재해석하려는 철학적 시도마저, 이렇게 인쇄 페이지 안에서부터 봉쇄되어야 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하며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과 금성의 위상 변화를 관측했고, 이를 통해 지동설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주장이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충돌한다고 보았고, 갈릴레오는 1616년 공식 경고를 받은 데 이어 1633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이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그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명령을 받은 장면은, 과학과 신앙 사이의 갈등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았다.

지오르다노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넘어서, 우주가 무한하며 다른 별에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상을 주장했다. 이는 인간과 지구를 신의 유일한 창조물로 여긴 교리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는 1592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8년간 수감된 뒤, 결국 1600년 로마에서 화형 당했다.

교회의 지적 경계선은 코스모스를 향한 과학만 배제한 것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 역시 오랫동안 ‘이교도의 지혜’로 분류되어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전 다수는 수도원 서가에서 먼지 쌓인 채 남겨졌고, 6세기 보에티우스가 라틴어로 요약·번역한 일부 발췌본만이 학문의 자락을 간신히 잇고 있었다.
12세기, 알안달루스와 시칠리아를 통해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은 파리 대학에서조차 ‘강단 금서( damnatio )’ 목록에 올랐다. ‘존재의 이성적 원리’라는 그리스적 관점은 계시를 중심축으로 삼은 스콜라 신학을 위협할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 철학은 중세 지적 생태계에서 의도적으로 ‘둑’ 밖에 묶여 있었고, 인간 이성과 자연 탐구에 대한 고대적 전통은 교회 권위 아래 장기간 잠복 상태에 머물렀다.


그러나 지구는 둥글었고, 진실은 땅속 불씨처럼 꺼지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탄압받은 사유들은 근대 과학 혁명과 인문 주의의 씨앗이 되었으니, 그 열매는 훗날의 인류가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다.




한편, 동쪽 대륙에서도 자연에 대한 경외는 오랫동안 이어졌지만, 그것이 권위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자연은 권력자의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천문관이 말한 하늘의 질서는 곧 권력을 의미하게 되었고, 코스모스의 운행과 자연의 이치에 대한 해석은 언제나 권력자의 입에 달려 있었다.


우리 조상들의 문명이라고 달랐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반도의 왕조 또한 ‘하늘’을 빌려 권위를 고정했다.
신라의 골품제는 출생에 따라 왕족·귀족·평민·노비를 엄격히 가르며, ‘성골·진골’이라는 혈통을 하늘이 정한 위계로 신성화했다.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진 노비(奴婢) 제도 역시 혈통 기반 노예 신분의 상속을 제도화했다. 사노비·공노비·솔거노비 등 복잡한 세분은 인구의 30% 이상을 ‘소유물’로 기록했고, 매매·상속·증여의 대상이 되게 했다. 국가의 제도 자체가 자국민을 노예화시켰다는 점에서 이는 실로 씁쓸한 우리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성리학은 인간관계를 ‘군신·부자·부부·장유·붕우’의 위계 안에 가두었고, 하늘(天)은 곧 임금·부친의 권위로 번역되었다. 이렇게 신분·권위가 하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고착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평등한 우주의 구성원이 아니라 서열화된 존재로 분류되었다.

땅과 별, 강과 바람 앞에서라면 누구나 같은 두려움과 경외를 품었을 인간은, 법전과 호적 앞에서 ‘양인’과 ‘천인’으로 갈렸다.

거대해진 문명은 결국 모든 인간이 코스모스에서 비롯된 동등한 자연의 일부임을 망각했고, 하늘을 닮으려던 조화의 이상은 신분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변모해 버렸다.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양육을 하며, 각자의 역할을 체계적으로 나누었던 고대 인류가 이러한 문명의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들에게도 폭력과 갈등, 전쟁이 있어왔지만 누군가의 풍요를 위해 누군가를 발아래 둔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생존을 위해 질서를 세우고, 공존을 위해 서로 나누며, 삶을 위해 코스모스가 상징하는 질서화 조화를 자기들도 모르게 행해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문명이 성숙해질수록, 인류는 더 이상 코스모스를 ‘경청’ 하지 않았다. 그들은 코스모스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잘못된 도구로 사용했으며, 때로는 침묵시키려 했다. 그리하여 문명이 나아간 방향은 코스모스의 조화를 닮아가려는 길이 아니라, 점점 더 소수의 기득권층과 권력자만을 위한 구조로 굳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태양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던 행성들을 하나씩 밀어내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행성이 없는 태양을 과연 태양계라 부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문명의 구성원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사회를 과연 문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시기의 문명은 그러했다. 이름만 문명이었지, 그 안의 코스모스는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권위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잃어버린 질서와 조화였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인류에게 과학 혁명과 인문주의라는 새로운 전환점이 도래했다. 그리하여 문명은 다시 코스모스를 마주 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처럼 하늘을 닮으려는 시선이 아니었다.
문명은 코스모스를 회복하지 않았다. 다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뿐이다.


인류는 긴 밤을 지나 새로운 아침을 맞이했지만, 그 아침에 바라본 자연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그 새로운 시선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