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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지배를 위한 진화

사라진 코스모스

by 더블윤
“무릇 탐욕에 눈이 어두운 자는 자기의 생명을 잃게 되느니라.”

잠언 1:19



유럽 문명의 르네상스 시기 이후, 과학혁명은 인간에게 이성을 되찾아 주었고, 인문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그 도구와 사상이 언제나 바른길로 향하건 것만은 아니었고, 여전히 인류에게 코스모스는 멀게만 느껴졌다.

인문주의 사상은 인간을 주체로 다시 세우고자 했다. 신의 질서 아래 종속되어 있던 인간은 이제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정의했다.
그러나 이 인간은 ‘보편적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이 말한 존엄은 여전히 백인, 남성, 시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유효했다.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을 외쳤지만, 그 혜택은 타민족과 식민지인, 여성과 노동자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 자율성, 윤리적 가치를 중시하며, 신의 권위나 전통적 가치관을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흑인을 노예로 만들고 어느 때보다 활발히 거래하는 모순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의 무지를 드러내고 이성으로 인도해야 할 과학마저도 이들의 모순적 제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되어 가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체질 인류학, 두개골 측정 등을 통해 백인은 문명인이고, 흑인은 본능적으로 미개하다는 인종간 우열 이론이 등장했다. 또한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자기들 멋대로 사회학과 결합시킨 사회적 다윈주의의 등장은 ‘자연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약자를 정당하게 밀어내는 논리가 되었다. 나아가 인간의 유전형질 가운데 우수한 것을 선별, 개량하여 인류 전반의 유전적 품질(genetic quality)을 향상할 수 있다고 보는 유사과학에 불과한 우생학으로 인해 국가 차원의 인간 선별이 자행되기도 했다.


인문주의에서 비롯된 계몽주의 사상과 국민 국가의 탄생은 국가와 국민을 이어주는 민족주의 사상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해방과 자율성의 언어였던 민족주의가 변질되면서 배제와 차별의 기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흑인 노예제, 식민주의, 파시즘 등과 결합하며 “누구를 인간으로 보느냐”는 문제와 서서히 맞물리기에 이르렀다.
타인을 배제하는 이념이 뿌리 깊게 심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18세기, 증기기관의 등장은 인류 문명을 완전히 새로운 궤도로 이끌었다.

씨를 뿌리고 해를 따라 일하며, 비를 기다리던 시간은 이제 공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에 밀려났다.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대체했고, 생산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늘어났다.

그 결과, 인간은 자유로워졌는가?


아니다. 인간은 더 철저히 분해되었다.

몸은 노동 단위가 되었고, 시간은 자본의 계산으로 환산되었다. 어린이와 여성은 값싼 노동력으로 동원되었고, 거대한 도시와 빈민가, 오염된 공기와 소외된 공동체가 그 대가였다.

이제 문명의 가장 큰 가치는 더 많은 ‘부’와 ‘속도’가 되었다. 조화는 회상 속 풍경이 되었고, 공존은 경쟁력 없는 언어로 퇴색되었다.


번영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형태의 욕망이 인간의 마음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욕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 지구적 재앙의 전주곡이 되었다.

산업혁명이 가져온 번영의 이면에는 전례 없는 환경 파괴가 도사리고 있었다. 석탄은 공장을 돌렸지만, 그 매연은 스모그가 되어 도시의 하늘을 가리고 인간의 폐를 질식시켰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의 템즈강은 더 이상 생명을 품은 강이 아니었다. 화학 염료와 폐수가 유입된 강물은 악취를 풍기며 죽은 강이라 불렸고, 콜레라와 각종 전염병이 도시를 휩쓸었다.

숲은 증기기관을 위한 연료가 되었고, 무차별한 벌목은 산사태와 홍수, 생태계 붕괴를 불러왔다. 인간은 땅에서 얻는 법을 잊고, 땅을 비우기 시작했다.

도시의 쓰레기와 폐수는 하수관 없이 방치되었고,

거리엔 오물과 오염이 가득했다. 근대 문명의 시작은, 공중보건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혼돈 속에 있었다.

산업의 심장은 강철과 석탄이었고, 그 댓가는 대기 속에 떠다니는 유독 입자와 땅속에 침투한 중금속이었다. 인간은 부를 얻는 대신, 숨을 잃어가고 있었다.

탄소는 이 시기부터 대기 속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축적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은 기후위기의 시계를 돌린 출발점이었고, 그 시계는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

그 시점부터 인류에게 자연은 더 이상 신성한 대상이 아닌, 소모 가능한 ‘자원’으로 전락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문명은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 돌입했다. 그 과정에서 수단은 중요하지 않았다. 전 지구적인 정복과 수탈이 벌어졌고,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권리와 자연의 질서를 침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인류는 이 시기에 ‘진화’했다.

그러나 이번 진화는 생물학적 ‘적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탐욕을 채우고 지배하기 위한 진화였다.

인간의 뇌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도구, 과학기술은 이제 세계를 설계하고, 환경을 통제하며, 생명을 재편하는 데 쓰이기 시작했다.


과학은 자연을 이해하려는 도구에서, 자연을 통제하고 개조하는 기술로 바뀌었다. 대륙은 분할되었고, 자원은 추출되었으며, 인간은 식민지화되었다. 콩고의 고무, 인도의 면직물, 아프리카의 금과 다이아몬드. 이 모든 자원의 뒤에는 ‘문명화 사명’이라는 구실이 있었고, 지도와 통계, 기후학과 의학은 모두 정복의 선두에서 그 역할을 다했다.

인간의 이성이 낳은 도구는 더이상 코스모스와 자연을 위한 지식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 그중에서도 소수의 지배자들이 품은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존재했다.




이 지배의 논리와 진화의 정점은 이제껏 본 적 없었던 파괴적인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폭발했다.

제국주의의 확산은 각국의 식민지 확보 경쟁을 일으켰고, 신대륙과 타 문명은 교류 대상이 아닌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산업화로 폭증한 원료·시장·인력 확보 경쟁으로 인한 대륙 분할 갈등은 끝내 국가 간의 충돌을 일으키곤 했다.
극단으로 치달은 민족주의는 파시즘이 되어 민족과 국경의 분쟁 격화시켰다.
각국의 산업발전은 유래없는 군비 경쟁을 촉발시켰고, 상호방위 동맹은 ‘도미노 효과’로 이어져 전면전 유발하기도 했다.
산업화는 부를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자본의 중요성이 심화되며 국가의 경제를 흔들기도 했고, 일부 국가들은 체제 안정과 내부의 결속을 유지시키기 위해 서슴지 않고 전쟁이라는 카드를 뽑아 들었다.

분열되는 인류에게 공존과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정의, 평화, 자유, 결속과 같은 달콤한 말을 내뱉으며 병기를 꺼내 들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인가.

진화된 인류의 전쟁은 그 어느 시기보다도 끔찍했다. 지식과 기술, 이성과 과학이 인류를 진보로 이끌던 도구였다면, 이제 그것은 파괴의 정밀도를 높이는 연산 장치가 되어버렸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이 본격적으로 전장에 동원된 시기였다. 머스터드 가스와 포스겐 가스는 공기를 매개로 사람의 폐와 피부를 파괴했고, 기계화된 총기와 전차, 항공기는 전쟁의 속도를 가속시켰다.
죽음은 더 멀리서,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발생했고, 과학과 기술은 서로를 파괴하기 위한 정밀한 계산의 언어로 변모했다.
세계 각국은 자신들의 ‘적’을 말살하기 위해 가장 뛰어난 능력인 지식을 무기화했고, 연구소와 실험실은 생명을 구하는 공간이 아니라, 죽음을 조율하는 전략실로 바뀌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 파괴의 진화를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레이더는 눈이 되었고, 암호 해독기는 귀가 되었으며, 로켓 기술은 지구의 경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개의 원자폭탄은, 단 하나의 ‘결정’이 수만 명의 생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진실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그 순간, 코스모스는 더 이상 존재의 경외가 아닌,
파괴할 수 있는 표적이 되었다.
하늘은 더 이상 별이 떠 있는 자리도, 자연의 리듬이 깃든 공간도 아니었다.
하늘은 오직 비행기와 폭격기, 미사일의 궤적이 지나는 경로가 되었고, ‘하늘을 닮은 문명’이라는 말은 그날 이후, 의미를 잃었다.




“We wanted to fly to the Moon, but instead we ended up hitting London.”
“우리는 달로 날아가고 싶었지만, 대신 런던을 맞췄다.”

– 베르너 폰 브라운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 로버트 오펜하이머


“Sooner or later, the capability for destruction will fall into the hands of those who have no conscience.”
“조만간, 파괴의 능력은 양심 없는 자들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 에드워드 텔러


“If only I had known, I would have become a watchmaker.”
“이럴 줄 알았다면, 나는 시계공이 되었을 것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인류가 맞이한 진화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한 적응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배를 위한 진화였고, 그렇게 코스모스는 인류 문명의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이 시기는 과학이 인류를 진보시킨 시기였지만, 동시에 자연과의 조화를 잃고, 윤리를 망각한 시대였다.
진보의 외형 아래, 파괴와 단절의 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더욱 불편한 진실은, 이 시기의 문명과 인간의 의식이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별을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만든 불빛 아래에서 자원을 수탈하고,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지구를 다시 설계한다.

인류는 과학을 통해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지배는 ‘공존의 지혜’가 결여된 지배였다.
기후는 변하고, 생물종은 사라지며, 인간 사회 내부에서도 불평등과 불균형은 심화되었다.
그렇게, 윤리 없는 의식의 진화는 코스모스를 동경의 대상에서 지워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묻게 된다.
우리는 정말 진보와 진화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화라는 이름으로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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