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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사라진 코스모스

현대 문명이 잃어버린 것들

by 더블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15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자기만 거하려고 땅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사야 5:8



오늘날 문명은 놀라운 기술과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이루어냈다. 스마트폰 하나로 지구 반대편 사람과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고, 클릭 몇 번이면 어떤 상품이든 집 앞으로 배달된다. 자동차는 전기를 먹고 달리며, 인공지능은 인간의 사고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마치 인류는 더 이상 한계가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끝없는 진보의 이면에는 무언가 본질적인 것이 빠져 있다. 인간은 무엇을 얻었는가 보다, 무엇을 잃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 잃어버린 것은 바로 ‘코스모스’다.


현대 사회는 문명의 정점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며 살아가지만, 마음은 점점 공허해지고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정보와 물질, 편의를 손에 넣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하고 고립되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도시의 불빛 속에서 별은 사라졌고, 밤하늘은 이젠 광고판보다 덜 주목받는다. 코스모스는 단지 천문학적 대상이 아니라, 삶의 질서와 조화에 대한 감각이었다. 그것은 인간을 외계의 객체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하나로 포섭하게 했던 인식의 틀이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다시 세웠고, 동시에 타자와 자연을 분리된 대상으로 만들었다. 스마트폰은 우주보다 더 오래 응시되는 존재가 되었고, 알고리즘은 코스모스의 순환 대신, 인간의 욕망을 선별하고 자극하는 도구가 되었다.




현대인은 더 많은 정보를 얻지만, 존재에 대해 덜 묻는다. 삶은 효율로 재단되고, 인간의 가치는 생산성과 소유의 양으로 환산된다. 성공이란 더 많이 가진 자의 이름이 되었고, 윤리와 철학은 잊힌 언어가 되었다. 종교는 의례로만 남았고, 공동체는 해체되었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만성적인 피로, 불안, 그리고 외로움이다.


이 고립은 단순한 정서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구조적 증상이 되었다. 정신의 병리학은 더 이상 일부의 것이 아닌 시대의 거울이 되었고,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그 거울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잃어간다.

기술은 본래 인간의 확장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왜곡하고 있다. 알고리즘은 인간의 선택을 도와주기보다 조작하고, 커뮤니케이션은 연결을 위한 다기보다 고립을 강화한다.
과잉된 정보는 인간을 더 현명하게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선택하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다. 알고리즘은 이러한 선택적 수용을 강화하고, 인간은 다양한 의견을 접할수록 더 다양한 사고를 갖는 것이 아니라, 더 단단한 편견을 형성하게 된다. 사고는 점점 단순해지고, 타인의 입장은 불편한 소음으로 치부된다.

그 결과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반박할 준비부터 한다. 공론장은 대화의 공간이 아니라 논쟁과 조롱의 전장이 되었고, 댓글 창과 게시판은 혐오와 적대의 언어로 가득하다. 다양성은 외쳐지지만 실제로는 동질성만이 환영받고, 타자를 향한 무지와 두려움은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진다. 남녀 간, 세대 간, 종교와 정치의 경계마다 균열이 일고 있으며, 누구도 타인의 자유를 진심으로 존중하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폐쇄성은 우리를 점점 더 작게 만들고, 점점 더 단절시킨다.
공동체는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과거에는 마을이, 가족이, 신념이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였지만, 오늘날에는 디지털 네트워크와 소비문화가 인간을 개인의 욕망 단위로 분리시킨다. 사람들은 점점 더 같은 생각, 같은 취향, 같은 가치관 속에서만 머물기를 원하고, 낯선 타자와의 마주침은 꺼리는 일이 되어버렸다.
공감과 연대는 피로한 일이 되었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동일성의 추구와 타자성의 배척이다. 알고리즘은 이러한 분리를 더욱 강화하고, 사회는 점점 더 세분화된 집단들로 나뉘며,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분노와 냉소로 응수한다. 이념의 경계는 벽이 되고, 세대의 차이는 단절이 되고, 신념의 다름은 적대가 된다. 인간은 더 많은 것과 연결되어 있지만, 더 이상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코스모스를 잃고, 자기 자신도 잃어가고 있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근거를 외부 지표에 의존하게 되어버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의 물음은 사라지고, '나는 얼마나 보이는가'라는 피상적 척도만이 남았다. 성공은 곧 소유의 양으로 측정되며, 삶의 기준은 '얼마나 효율적인가'로 결정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잊고, ‘어떻게 더 많이 가질 수 있는가’만을 생각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평가는 디지털 수치로 환산된다. 팔로워 수, 좋아요 개수, 조회 수는 더 이상 단순한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곧 존재의 가치이자, 자기 인식의 기준이 된다. 인간은 자신을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반응을 갈망하는 콘텐츠로 전락시키고 있다. 존재는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노출과 소비에서 비롯된다는 착각이 만연하다.

삶의 기준은 점점 물질적 성공과 효율, 개인의 만족으로만 좁혀지고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 철학적 성찰과 존재에 대한 질문은 잊혀졌고, 넘쳐나는 정보와 일회용 물질들 속에서 인간은 점점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
철학은 낡은 학문이 되었고, 종교는 껍데기만 남았으며, 공동체는 해체되어 버렸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피로와 불안, 그리고 만성적인 외로움이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공동체적 유대보다, 나만을 위한 선택을 더 자주 한다.

그러한 사회에서 인간의 정신은 점차 피폐해져 간다. 내면의 고요함은 사라지고, 비교와 경쟁, 과잉 자극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자아만이 남는다. 불안은 일상이 되었고, 우울은 시대의 공통 정서가 되었다. 정신 건강은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적 병리로 떠오르고 있다.

사람들은 쉬지 않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만족은 늘 미끄러지고, 휴식은 죄책감으로 가득 찬다. 자존감은 외부의 인정에 휘둘리고, 자아는 끊임없는 노출 속에서 닳아 없어져 간다. 현대인의 정신은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 못한 채, 그저 살아남기 위해 견디는 상태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감정조차 효율적으로 소비하고, 슬픔과 기쁨마저 타인의 시선 아래 연출하려 한다. 진실한 내면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사회적 가면만이 생존의 도구로 남는다. 정신의 황폐는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보편적인 풍경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내면적 파괴와 더불어 외부 세계의 파괴도 멈추지 않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단절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자연을 더 이상 자신을 낳은 어머니로 인식하지 않고, 단지 소비하고 착취할 자원으로만 바라본다.

우리는 더 이상 코스모스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고 말 그대로 자연과 단절되었다.


인류는 더 이상 별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대신 도시의 불빛 아래서, 빌딩 숲 속에서,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 위에서 하루하루를 소비한다.

과잉 소비로 지구의 폐를 태우고, 편리함이라는 이름 아래 기후를 흔들며, 생물 종의 멸종을 가속하고 있다.

산은 깎이고, 강은 막히며, 바다는 쓰레기로 가득 찼다. 기후는 점점 불안정해지고, 해수면은 상승하며, 생태계는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매년 수천 종의 생물이 멸종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뉴스의 한 줄로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 문명의 지속 가능성 자체를 위협하는 본질적 위기다.

기후 위기는 미래의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는 이미 경고하고 있으며, 자연은 침묵 대신 붕괴라는 방식으로 응답하고 있다. 폭염과 가뭄, 산불과 홍수는 전 지구적 재앙으로 번지고 있고, 식량 생산과 생존 기반마저 위협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편리함을 포기하지 못하고, 이 위기를 구조적 전환이 아닌 기술적 미봉으로 덮으려 한다.

일부에서는 이를 경고하고 행동을 촉구하지만, 전 지구적 관심은 여전히 부족하다. 환경 보호는 선언문에만 존재하고, 회의장 안의 연설로만 남는다. 나무를 베고 나서야 탄소배출권을 논하고, 바다를 오염시킨 후에야 친환경 플라스틱을 연구한다.
소수의 사람들은 이 심각한 현실을 고발하고, 침묵하는 대중에게 절박한 경고를 보낸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목소리에 ‘좋아요’ 하나를 누르는 것으로 참여했다고 여기며, 다시 손에 든 스마트폰과 쇼핑몰 속 할인 배너로 눈길을 돌린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기보다, 나를 더 편하게 만들어줄 새 물건을 찾는 데 더 열중한다.
우리가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지구는 결국 인간 없이도 회복되겠지만, 인간은 지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는 더 이상 환경 보호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며, 문명 유지의 경계선이다.

환경 문제는 전 지구적 재앙이며, 지금 이대로라면 인류는 결국 스스로를 멸종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 멸종이 우리 눈앞에 와 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어린 시절의 기후와, 성인이 된 지금의 기후가 다르다는 것을 몸소 느낀다.
내 자녀들의 세대는 지금 이 지구의 모습을 '원래 그런 것'이라 믿겠지만, 그들이 성장할수록 이 변화는 더욱 거세질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는… 이 기후 변화를 느낄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거대한 징후다. 인간은 기술이라는 도구에 스스로를 넘기며, 효율과 속도에 중독되어 존재의 본질을 잃었다. 정신은 고립되고, 공동체는 해체되었으며, 타자에 대한 이해는 혐오로 대체되었다. 자연과의 관계는 파괴로 이어졌고, 우리는 그 결과를 눈앞에서 목도하고 있다.
우리는 더 많이 알고 있지만, 더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더 넓게 연결되어 있지만, 더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발전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코스모스를 되찾는 일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철학이며, 문명을 다시 인간적인 것으로 되돌리는 첫걸음이다.
진정한 문명은 질서와 조화를 담은 코스모스를 기억하는 인간의 윤리에서 시작된다.


결국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정말 진화하고 있는가?
아니면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더 떨어져야,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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