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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우리는 설계자다

by 더블윤
“우리는 기술을 통해 세계를 만들지만, 그 세계는 곧 우리를 다시 만든다.”

피터 슬로터다이크



인류는 오랜 세월 미래를 점쳐왔다.
하늘의 별을 읽고, 바람의 움직임을 따르며, 불확실한 내일을 예언하는 존재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예언자가 아니다.
우리는 미래를 직접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설계자가 되었다.

과학은 이제 필연이다.
우연과 돌발의 시대는 지나고, 과학은 명확한 방향성을 띤 도구가 되어 우리 손에 들려 있다.
유전자 편집에서 인공지능, 기후 제어, 인류의 인식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 우리는 미래를 구성할 수 있는 기술력을 이미 갖췄다.
이 과학기술은 우리 문명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만으로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미래를 완성하리라 보장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미래의 문명이 3차 인지혁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설계를 시작해야만 한다.
이 책을 통해 제안한 3차 인지혁명의 관점에서 보면, 설계란 단순히 기계나 알고리즘의 구조를 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을 재구성하는 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가 설계해야 하는 것은 더 빠른 기계, 더 강한 무기, 더 편리한 도구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의식, 그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본능의 재구성’이야말로 설계의 시작이자 끝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설계해야 할 것은 과학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설계의 방향은, 인간에 대한 존중을 중심에 둔 과학, 자연과 공존하는 기술, 그리고 감정과 영혼을 기억하는 문명을 세우는 일이다.

여기에선 크게 세 가지의 과학과 문명의 설계 방향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존엄을 지키는 규범적 근육을 만드는 인간 중심의 설계이다.

3차 인지혁명이 요구하는 첫 번째 설계는 인간 존엄을 중심에 둔 과학이다. 인간 중심의 설계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방향을 다시 묻는 실천적 원칙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 중심을 상실한 과학이 어떤 비극을 만들어냈는지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산업혁명기, 인간은 기계의 부속품이 되었고, 전쟁의 시대에는 통계로, 실험 대상으로 환원되었으며, 오늘날엔 감정과 사고마저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계산되는 상품이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든 과학에 의해 기능으로 재단되고, 효율로 평가받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능력의 확장’만을 추구한 1·2차 인지혁명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흐름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가 설계해야 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구조가 아니라, 그 기술 안에 담겨야 할 인간에 대한 존중과 책임의 구조이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은 사람을 판단하기 위해 만들어져선 안 된다. 그보다는 인간의 선택과 존엄을 보조하는 공정하고 투명한 조력자로 설계되어야 한다.
AI는 채용이나 사법 판단, 의료 진단 등에서 편향을 제거하고, 다양성을 반영하는 알고리즘 구조를 가져야 하며, 그 기준은 오직 기술의 성능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존엄에 얼마나 기여하는가로 평가되어야 한다.

또한, 유전자 편집 기술은 생명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었지만, 그 가능성은 반드시 도덕적 경계 안에서 통제되어야 한다.
생식세포 조작, 배아 실험, 생명선택 기술은 국제적 합의와 윤리 기준 위에 있어야 하며, 과학이 생명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을지라도, 생명의 의미까지 설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기술은 더 이상 소수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장애인, 고령자, 저소득층, 디지털 소외계층이 기술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우리는 포용적 설계와 접근성 기반의 과학 인프라를 함께 구축해야 한다.
인간 중심의 설계는 ‘어떤 인간’이 아닌 ‘모든 인간’을 위한 과학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3차 인지혁명을 위해 필요한 ‘규범적 근육’의 강화다.

과학의 진보 안에 우리라는 존재가 없다면, 과학과 지식과 기술이 다 무슨 소용 이겠는가?




두 번째는, 우리의 생존 본능을 재구성할 수 있게 만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설계이다. 이는 자연과의 공존을 본능화하는 것과 같다.


3차 인지혁명의 궁극적 변화는 경쟁과 지배가 아니라, 조화와 공존을 본능적으로 선택하는 의식 전환이다.
과학은 단지 인간의 번영을 넘어, 우리를 둘러싼 생명과 생태계, 그리고 지구라는 행성 전체와의 조화 안에서 작동해야 한다. 그리고 과학이 자연을 지배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연의 질서와 리듬에 맞추는 도구가 될 때, 우리의 생존 본능도 재구성된다.

이제 과학은 자연을 설계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를 다시 건설해야만 한다.
즉, 자연과 조화하는 설계란, 단순히 친환경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기준을 단기적 효율이 아닌 생태적 지속가능성에 두는 일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인류의 에너지를 더 많이 생산하기보다 더 적게 소비해도 되는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
건물은 열 손실을 줄이고, 에너지 순환이 가능한 구조로 지어져야 하며, 도시는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구조물이 아니라, 바람, 빛, 물, 흙과 공존하는 유기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기술만이 아니라, 기후 위기를 유발하지 않는 삶의 방식 자체를 설계해야 한다.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장치보다, 탄소를 만들지 않는 구조적 습관을 만드는 것이 더 근본적인 설계다.

자연과의 조화 없이는,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존재의 자리를 잃는다. 이것은 생각보다도 더 심각하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계하는 과학은 함께 살아가는 과학이자, 함께 살아남는 과학이 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자연과의 공존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전제이다. 변화될 문명, 나아갈 코스모스, 다가올 인지혁명을 위해 우리는 생존해야 하며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셋째, 내면과 문명의 성숙을 위한 설계이다.

과학이 가져와야 할 3차 인지혁명은 산업혁명과 달리 기술이나 산업의 발전보다 ‘집단의식의 성숙’을 핵심 목표로 한다.
따라서 문명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지식의 양적 확장이 아니라, 가치 판단과 공감, 반성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문명의 새로운 기준이 되어야 한다. "기술이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 수 있는가", "문명을 더욱 깊이 있는 존재로 인도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이 더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과학은 이제 인간의 내면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지식의 확장보다 인식의 성숙을, 도구의 정교함보다 존재의 깊이를 추구해야 한다.
이제 과학은 인간의 외부를 넘어서, 내면의 질서와 문명의 방향까지 함께 설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내면의 성숙은 단순히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감의 능력, 반성적 자아, 그리고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기술은 인간에게 그러한 환경과 기회를 열어주고, 평화와 공존,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는 존재로 이끌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요즘의 발전된 감정 인식 기술은 AI의 공감능력 모방을 위해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그 기술은 인간의 공감능력 향상을 위해 쓰일 수 있어야 하며, 인간 사이의 단절을 좁히고, 상처받은 마음에 더 따뜻하게 다가가는 언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AI는 상담사나 교사, 돌봄자의 역할을 하더라도, 인간을 흉내 내는 존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성숙을 돕는 존재, 내면의 거울이 되는 존재로 나아가야 한다.

개개인의 내면 성숙은 자연스럽게 문명의 성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성숙한 문명은 능력의 확장, 기술 중심의 문명에서 벗어나, 철학과 예술, 영성과 관계를 품은 문명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더 많은 데이터를 모으는 문명의 모습에 치중해서는 안된다. 더 깊이 사유하고 더 넓게 이해하는 문명을 설계해야 한다.
우리가 설계해야 할 문명은 효율과 성장의 문명이 아니다. 그 문명은 기억과 책임, 반성과 지향을 품은 문명이어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다시 질서와 조화의 세계인 코스모스로 이끄는 길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명만이 인류의 길 앞에 또 다른 인지혁명이라는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설계자다.
설계의 핵심은 코스모스를 다시 바라보는 일이다.
파괴를 멈추고, 조화를 회복하며, 우리 내면의 질서를 되찾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길의 중심에는 늘, 인간이 있어야 한다.

위에서 제시한 설계의 방향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나의 사유일 뿐이고 이러한 사유들이 모여 진정한 가치를 담은 과학과 문명의 길을 제시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화를 설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설계는 더 높은 이해, 더 깊은 공감,
더 넓은 사랑과 연결의 감각으로 향해야 한다.

우리의 설계는 완벽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코스모스를 향하는 한, 이 불완전한 설계마저도 충분히 아름다울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과학은 방주가 된다.
그리고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본다.

우리 안의 우주, 그리고 그 너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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