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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스피드보트에서 방주로

by 더블윤
"기술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지만, 윤리가 없다면 그 힘은 파괴로 향할 수 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조금 더디게 가더라도, 올바른 길로 가야 한다."

소크라테스



과학의 역사는 곧 속도의 역사였다.


과학은 오랜 시간, 멈추지 않는 성장을 이어왔고, 우리는 매 세대를 거치며 이전 세대가 상상조차 못 했던 속도로 기술을 진보시켰다. 그 성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빠르고, 치열하고, 눈부셔졌다. 오늘날의 과학의 성장 속도를 그래프로 표현한다면 가파른 기울기를 가진 지수 함수의 그래프를 그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계를 돌파하며 기술을 진보시키고, 무지를 밀어내며 세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과학의 가파르고 빠른 성장 속도는 마치 인류를 이끄는 스피드보트와 같았다. 그 속도는 때로 인간을 황홀하게 만들었으며, 그 속도에 매료된 인류는 더 빠르고 더 화려한 스피드보트를 만드는데 매진해 왔다. 우리는 기술적 가속 자체를 진보의 증거로 착각했고, 그 황홀감 속에서 속도가 곧 ‘선’이라는 믿음을 만들었다.
하지만 속도는 방향을 보장하지 않는다. 목적이 사라진 항해는 결국 목적지를 잃고 표류한다.
스피드보트의 엔진은 점점 강력해졌지만, 우리는 그 배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무엇을 싣고 가야 하는지 묻는 일을 게을리했다. 그 결과, 어느새 우리는 빛의 속도로 ‘어디론가’ 가고 있지만, 그 ‘어디’가 어디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시대에 서 있다.




실제로 현대의 과학 기술의 발전 속도를 우리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기술적 속도와 윤리적 방향 사이의 불균형은 이미 수없이 목격되었다.
인터넷이 처음 나왔을 때, 초기 인터넷 사용자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필터링 없는 수많은 정보에 노출되었다. 분명 그 정보 안엔 유익한 정보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부적절하고 유해한 정보들이 어린 사용자들에게 여과 없이 흘러들어 갔다.
오늘날을 바라보면 어떨까? AI 활용에 대한 윤리적인 합의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기 전에 AI는 이미 거침없이 성장해버리고 있다. 생성형 AI의 놀라운 능력을 활용하여 부적절한 영상을 만들거나, 허위 정보를 만들어 배포하는 경우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만나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부작용’이 아니다. 속도만 있고 방향이 없는 기술은 필연적으로 이런 결과를 낳는다. 앞으로의 과학 기술의 모습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양자 컴퓨팅, 로봇 공학, 유전자 편집 등의 기술들은 우리를 미래로 인도하는 것 같은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지금과 같은 성장 속도가 계속된다면, 우리는 또다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부디 그 소를 잃는 일이, 돌이킬 수 없는 파괴적인 일만 아니기만을 기도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 만든 기술 앞에서 숨을 고를 필요성이 있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른 채 너무 멀리 와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과학의 항해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더 이상 빠르게 가 아닌, 깊이 있게.
더 이상 먼 곳이 아닌, 의미 있는 곳.
스릴과 쾌감이 아닌, 어떤 파도도 견뎌낼 수 있는 안정감을 위한 항해.

굳이 배에 비유한다면, 과학은 이제 구원의 힘을 담은 방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생명을 지키고, 다양성을 품고, 균형을 이루며, 조화를 노래할 수 있는 그런 방주 말이다.
방주는 단지 물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배가 아니다. 그것은 방향과 목적,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다양성의 선언이다.

오해는 하지 않도록 하자. 방주가 반드시 느릴 필요는 없다. 과학의 성장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과학의 성장이 문명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 과학은 언제나 중립적이다.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서는 노아의 방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이들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아니, 굳이 성경의 일화를 모르더라도 방주가 의미하는 바는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인류를 존속시키게 해 주었던 '방주'에 대한 일화는 세계 곳곳의 신화적 이야기에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방주란 '구원'과 '생명의 존속'의 도구였다. 그리고 그 안에 실린 것은 단일한 생명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 다른 형태, 다른 가능성들이었다.


우리의 과학 또한 인류의 '구원'과 '생명을 존속'시키는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과학을 그러한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우리는 유전자를 편집함으로 어떤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가.
우리는 지구를 떠날 만큼의 기술을 가졌지만,
정작 이 행성 위에서의 공존을 배운 적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우리가 과학기술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항상 떠올려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이루고자 하는 바는 인류의 공존과 조화, 생명의 지속이어야 한다.

그리고 방주 안엔 다양한 종의 생물이 탑승하였다. 오늘날의 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이라는 방주 위에는 더 이상 과학자만 타선 안 된다. 철학자, 예술가, 종교인, 시민, 그리고 미래 세대를 대표할 목소리가 함께 해야 한다. 과학이 모두의 미래를 결정한다면, 그 결정은 모두의 목소리 속에서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방주는 ‘구원’의 도구이지만, 여기서 구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 번째로, 기후 붕괴, 전쟁, 기술 오남용과 같은 문명적 파국으로부터 생존을 지키는 일이다.
과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 되어야 함과 동시에, 위기를 감지하고, 예방하며, 대응하고, 회복하는 전 과정을 포괄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기후 붕괴를 막는 일에서 생태적 한계를 존중하는 규범을 세우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환경영향평가를 강화해 연구와 산업 활동의 환경 피해를 사전에 차단하고,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과학계와 기업의 의무적 기준으로 고정해야 한다. 기후공학과 같은 새로운 기술은 감축을 대신하는 면죄부가 아니라 보완 수단으로만 쓰여야 하며, 재난 예측 모델과 대응 기술은 전 세계가 공유하는 공공재로 운영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취약국과 취약계층이 기후 대응 기술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기후 정의’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전쟁을 억제하는 일에서도 이젠 과학윤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자율살상무기와 같은 기술은 국제적 합의하에 전면 금지하거나, 최소한 의미 있는 인간의 통제를 받도록 해야 한다. 생물·화학무기 연구는 민간 목적 외 전용을 원천 차단하는 관리 체계 안에 두어야 하며, 무기 개발과 판매 과정은 국제기구의 감시 아래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과학자는 단지 기술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그 기술이 정치와 군사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에 대해 책임 있게 발언하고, 정책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
기술 오남용을 막는 데에도 과학윤리는 깊숙이 관여한다. 인공지능, 유전자 편집, 양자 컴퓨팅처럼 잠재적 위험이 큰 연구는 개발 초기부터 독립 윤리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 하며, ‘출시 후 대응’이 아니라 ‘출시 전 검증’이 원칙이 되어야 한다. 합성 미디어에는 워터마크와 원본 검증 기술을 의무적으로 적용하고, 생명공학은 인간 존엄을 훼손하는 금지선을 명확히 해야 한다. 또한 기술이 불평등을 심화시키지 않도록 접근권을 보장하고,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이를 추적하고 배상할 수 있는 책임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결국 과학이라는 방주는 안전을 위한 항해를 해야만 한다. 기후 붕괴를 늦추고, 전쟁의 참화를 막으며, 기술 오남용의 문을 닫는 것—이 세 축이 함께 작동할 때 과학은 문명을 파괴하는 무기가 아니라, 회복과 지속 가능성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


두 번째로, 단지 살아남는 것을 넘어, 인간성과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것은 ‘어떻게 더 잘 살 것인가’라는 인문적 물음에 응답하는 방향으로 과학의 힘을 쓰는 일이다.

우선 과학은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의료기술과 뇌과학은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감정과 인지 기능을 더 잘 이해하고, 정신적 고통을 줄이며, 치유와 공감을 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정밀의학은 각 개인의 유전적·환경적 특성에 맞춘 맞춤 치료를 가능하게 하여, 환자를 ‘질병의 집합체’가 아니라 고유한 존재로 존중하게 만든다. 인공지능은 단순한 업무 대체를 넘어 장애인을 위한 보조 기술, 언어·문화 장벽을 낮추는 통번역 시스템 등 ‘관계의 회복’을 돕는 방식으로 쓰일 수 있다.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도 과학은 강력한 도구가 된다. 정보통신기술은 단절된 사람들을 연결하고, 전 지구적 규모의 협력을 가능하게 한다. 기후 위기 대응, 전염병 통제, 우주 탐사와 같은 글로벌 프로젝트는 과학을 매개로 인류가 하나의 목적 아래 협력하도록 만든다. 또한 농업과 식량과학은 지역 사회의 식량 자급률을 높이고, 분산형 에너지 기술은 에너지 자립을 통해 공동체의 안정성을 강화한다.
더 나아가 과학은 의미 있는 삶을 창조하는 상상력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천문학은 인간이 우주 속에서의 위치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고, 환경과학은 우리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일깨운다. 인문학과 결합한 과학 교육은 ‘지식’이 아니라 ‘이해’를, ‘기능’이 아니라 ‘관계’를 배우게 한다. 기술은 생산성과 속도를 높이는 데만 쓰이지 않고, 예술·문화·교육을 확장하는 데도 활용될 수 있다.
결국 과학이 이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효율성’과 ‘편리함’을 넘어 ‘가치’와 ‘목적’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기술은 인간의 손발을 대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더 깊이 느끼고, 더 넓게 연결되고, 더 온전히 살아가도록 돕는 데 쓰여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과학은 단순히 생존을 연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창조적 동반자가 될 수 있다.

방주가 단순히 재난 회피용 피난처라면, 그 항해는 일시적인 도피에 불과하다. 하지만 방주를 다음 문명을 설계하는 작업실로 만든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치, 새로운 질서, 새로운 공존의 원리를 빚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주가 제대로 항해하려면, 단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당신이 탑승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은 더는 소수의 지식이 아닌, 모두의 의식 속에서 함께 진화해야 한다.
당신이 탑승하지 않은 과학은, 당신의 윤리와 철학, 그리고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그 모든 것이 반영되지 않은 채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방향 없이 빠르게 흘러가기만 하는 이전 일을 반복하는 것이며, 결국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성장이다.

기술 발전은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도 계속된다. 참여하지 않으면, 방향은 소수에 의해 결정되고, 우리는 그 결정의 수혜자이자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

독일출신의 미국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나치 독일의 친위대였던 아이히만 재판에서 그는 괴물 같은 악마로 비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주어진 일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말하는, 관료적인 얼굴을 한, 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평범함이야말로 섬뜩했다. 왜냐하면 악은 종종, 증오나 사악한 의도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사람들의 손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실행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과학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의 코드 한 줄, 유전자 편집의 미세한 변화, 기후변화를 무시한 산업 설계. 이것들은 누군가의 ‘작은 업무’로 시작된다. “나는 단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라는 말은, 과학이라는 방주가 표류하여 빙산에 부딪히는 순간에도 들릴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윤리는 방주의 나침반이자, 모든 승무원이 공유해야 할 항해 지도다.
과학은 속도를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속도에 탄 사람들의 내면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는다면, 방주는 생명을 실은 채 침몰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술자와 과학자, 정책결정자와 시민 모두가 ‘사유의 의무’를 지녀야 한다. 방주의 항로를 그리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배 위에 오른 모든 이들이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가?’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결국, 방주가 구원의 상징이 되려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키를 잡을 자격과 책임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은 단지 거대한 결단의 순간에만 아니라, 매일의 작은 선택과 실행 속에서 이루어진다. 악의 평범성은 바로 이 순간들을 노린다. 그렇기에 방주 위의 모든 사람은, 바다의 방향을 묻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방주를 재앙이 아닌 미래로 이끄는 유일한 길이다.




과학은 본래 진리를 향한 순수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 순수함이 권력과 이익, 지배와 소비의 언어로 바뀔 때 우리는 방향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새로운 과학은 지속 가능성과 윤리, 내면과 조화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지금 이 문명의 다음 장은, 속도의 경쟁이 아닌 가치의 성찰로 써 내려가야 한다.

과학은 이제
인류 전체를 위한 방주로 항해해야 한다.
파괴가 아닌 회복을 위해,
지배가 아닌 공존을 위해,
확장이 아닌 돌봄을 위해.

이제, 항해는 계속된다.
하지만 그 항해는 이제
구원의 이름으로, 사랑의 방향으로, 미래의 책임으로 모두의 관심 속에서 나아가야 한다.


그러니
부디, 이 방주 안에 당신도 탑승하기를 바란다.
부디, 이 방주가 표류하지 않도록 키를 잡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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