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개별 Oct 07. 2024

습작 원고의 반란

출판 앰버서더 선정


우리 집 1학년 꼬맹이가 독후감 대회에서 상을 타던 ,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작고 앙증맞은 손으로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적어 내려가는 모습도, 시상대에 올라 노력의 결실을 수확하는 장면도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했던 과제가 아니라 즐거움을 찾고자 했던 자발적 행동이었음에 자부심마저 느끼고 있었다. 나보다 한참이나 어리지만 배울 점이 차고 넘치는 아이다.


때를 묻는다면 그건 시상식 바로 다음날부터였다.  고요하고 적막했던 새벽은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아이들을 재우다 잠들었던 두세 시간 만으로도 고단함이 녹아내렸고, 필터로 걸러낸 듯 선명히도 맑아진 정신은 내 손가락들을 자유로이 춤추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침대에서 행복한 꿈을 꾸던 그때, 나는 노트북 앞에서 무한한 꿈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딸아이의 소원처럼 출간 작가가 되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말이다.




어떤 이야기를 써볼까에 대한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쓰기에 대한 욕구가 강한 탓에 일단 빠르게 쓰고 싶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 지금 가장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게 시작된 스타트 지점으로 돌아가보기로 했다. 혹독하고 잔인했던 현실과 싸우던 소녀 시절의 나를 끄집어내기로 했다. 당시의 경험뿐 아니라 느껴진 생각과 감정들을 끄적여보기도 했고, 조금 멀치감치 떨어져 나를 바라보기도 했다. 고독한 슬픔과 차디찬 외로움이 내 모든 걸 지배하려 들고 있다는 걸 발견했고, 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더는 피투성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온전한 나를 찾고자 시작한 글쓰기는 마음을 어루만졌고, 상처를 치유했으며, 희망찬 내일을 선물했다. 더불어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가며 살을 보태다 보니 제법 도톰한 원고가 나왔다.




매일의 감정에 충실하여 휘리릭 썼던 글에 완성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출간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에 갈고닦아보기로 했다. 모난 구석이 많고 어지간히도 볼품없던 돌멩이가 점차 둥그스름한 모양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한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을 내지는 못했지만, 안정적으로 쥘 수 있는 돌이 되었달까. 기막힌 서사가 있거나 머릿속에 그림이 절로 그려지는 맛깔난 표현들이 들어간 원고는 아니었지만, 쉽게 읽고 공감할 수 있도록 스토리 구성과 전개에 크게 신경을 썼다. 잘 가다듬은 습작이 세상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 그날을 마냥 기다리겠노라 다짐했고, 그렇게 에세이 공모전 두 군데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이후 목 빠지게 기다렸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No'다. 아이들을 키우느라 그리도 좋아했던 책과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에세이라는 장르를 거의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단 1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좋은 경험이 되겠거니 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다시 회사를 다니게 되면서 공모전에 원고를 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다. 새로운 직장에 빠르게 적응하고 맡은 바를 잘 해내고 싶었기기에 여느 때와 같이 열정을 쏟고 있던 어느 날의 정오. 휴대폰 진동이 유난히도 길게 울렸다.


"여보세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쿠팡 반품 회수 일정이 당겨져 지금 당장 문 앞에 내놓으라는 기사님의 부탁, 또는 나도 모르게 수락해 버린 마케팅 수신 동의로 인한 광고 전화. 그러나 예상 밖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OOOO 출판사입니다. 보내주신 원고 잘 보았습니다. 자사의 출판 앰버서더로 선정되어 전화드렸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마케팅 담당자라고 소개하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실 여부 확인이 필요했다.


"네? 제가 맞아요?"

"네, 맞습니다. 기뻐하시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웃음). 메일 하나 보내드렸습니다. 계약 조건 등이 기재되어 있으니, 보시고 진행 가능여부 회신 부탁드릴게요."


통화를 마치고도 사실이 믿기지 않아 얼떨떨한 기분으로 오후를 보내야 했다. 무슨 정신으로 이후의 일정을 소화했는지 지금도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직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도 않았으니, 동네방네 소문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몇 시간을 혼자 히죽거리며 웃고 있어야 했다.




서너 시간이 지났을까. 메일 앱 알림이 도착했다.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네이버 육아 인플루언서 4년 차, 하루에 10통 가까운 문의 메일을 받고 있었기에 원고 의뢰 또는 협찬이라고 생각하고 메일을 열었다.


'읽고 이해하기 쉽게 잘 쓰인 글로 작가의 성장기와 치유의 과정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비슷한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원했던 에세이 공모전 모두에 당선이 되었다는 연락을 같은 날 받게 되다니, 내가 아직 꿈속에 있는 건가 싶었다. 양손을 펴고 제법 힘을 주어 양 볼을 툭툭 때려보았다. 책 속에서는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는 이렇게 한다고 배웠기에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볼따구가 아파왔다. 생시가 틀림없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나에게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출판사들 각자의 일정에 차질이 없으려면 빠르게 결정해 주는 게 맞겠다 싶었다. 어떤 출판사와 계약을 해야 하지. 지금도 사실 잘 믿기지는 않는다. 꽁꽁 숨겨두고 나만 주야장천 볼 줄 알았던 습작 원고가 반란을 일으킬 줄이야.

이전 05화 사건의 발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