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도 평범한 아이 둘 아줌마, 당시의 내 모습이었다. 1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며 단 한순간도 잃지 않고자 노력해 왔던 품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며칠째 같은 옷을 입은 탓에 쉰 냄새가 폴폴 풍겼고 머리를 베베 꼬아 집게핀으로 대강 고정시킨 모습, 그게 나였다. 아침마다 세수를 하러 거울 앞에 서야 하는 일에는 언제나 곤혹스러움이 따르곤 했다. 비루하기 짝이 없는 나의 모습을 매일 바라봐야 하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존감은 바닥이 다 보일 지경이었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지는 이미 오래였다. 태어난 김에 숨을 쉬고 살아가는 의지 박약한 대한민국의 국민이었고, 엄마라는 본분은 거저 얻어진 수식어에 불과했다.
"팀장님, 저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재입사를 했던 회사였다. 유능했던 사수가 팀장이 되었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나의 모습을 눈여겨봤었다며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을 해왔다. 나의 전 사수는 배려심 넘치고 똑똑한 데다 지혜로운 사람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전 직장에 다시 입사하게 되었다. 입사 당일 깨끗하게 잘 인쇄된 연봉 계약서를 받았다. 사인을 하려고 보니, 내가 들었던 연봉보다 더 높은 금액이 기재되어 있었다. 오타가 난 것이라고 생각하여 눈앞에 있던 HR 담당 직원에게 넌지시 얘기를 꺼냈다. 그러나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재입사인 만큼 오래오래 다니며 회사에 많은 기여를 해달라는 HR 팀장의 특별 지시였다고 했다. 재입사 당일부터 예상 밖의 환대를 받으며 기분 좋게 다시 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런 회사와 팀장에게 입사 6개월 만에 퇴사를 고해야 했다. 아이 둘을 지극 정성으로 케어하던 친정 엄마가 갑작스럽게 떠나버리며 아이들을 돌볼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데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극도로 무서워했던 둘째를 기관에 맡겨보고자 힘을 써봤지만, 그 노력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한두 푼 더 벌어보자며 아이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또래에 비해 발달이 느린 아이였기에 어린이집 입소를 강행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언제나 완벽에 완벽을 기했던 팀장, 난 그의 오점이었고 과오로 남아버렸다. 나의 업무를 미룬 채 급하게 떠나야 했기에 팀장뿐 아니라 팀원들에게도 못할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나를 향한 원망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 한가득 담겨 있을 것이 뻔했기에 차마 죄송하다는 말조차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동안 회사에서 사용했던 나의 물건들을 담은 박스보다 더 무거웠던 나의 마음을 부축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회사를 관두고 아이의 육아와 교육에 최선을 다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예상했던 시기가 너무 빠르게 와버렸기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했다. 새벽까지 장사를 했던 남편은 언제나 집에 없었다. 부모의 역할을 오롯이 혼자서 다 해내야 했다 보니, 시행착오가 끊임이 없었다. 다녔던 모든 회사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인정을 받았듯, 육아라는 분야에서도 잘 해내고 싶었다. 틈틈이 육아 서적을 읽고 부모들을 위한 강연을 찾아다니며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생각했던 좋은 엄마가 되는 기준이 아이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음을 깨닫기까지 장장 3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 나이로 8살,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첫째는 학교 입학과 동시에 매일 2~3개의 학원을 다녀야 했다. 주 3회 하루 2시간씩 영어 학원에 앉아 있어야 했고, 주 2회 하루 1.5시간씩 수학 학원을 다녀야 했다. 태권도, 댄스, 미술, 피아노까지 다녔기에 그녀에게 쉴 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평일은 언제나 오후 대여섯 시쯤 집으로 돌아왔고, 아이에게 주어진 유일한 휴식은 저녁 식사 그리고 샤워 시간뿐이었다. 이후에는 학교와 학원 숙제를 쳐내듯 빠르게 풀어 나가야 했다. 독서와 글쓰기 또한 게을리할 수 없었기에,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책을 읽고 독후 활동을 함께 했다. 잘 따라주지 않은 날은 버럭 화를 내기도 했고, 아이의 기분을 살피며 살살 달래기도 했다. 지금 막내가 쓴 글을 다시 한번 읽어봤을 뿐인데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것 같다.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1학년 아이에게 난 무슨 짓을 한 걸까.
터질게 터지고야 말았다. 첫째는 4월 말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5월 초에는 그녀에게 폐렴이 찾아왔다. 그 폐렴은 둘째에게도 옮겨갔고, 난 아이 둘을 데리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당시 어린이 병상이 심하게 부족하던 때였기에 대기 리스트를 작성해야 했다. 1분에 50번 이상 기침을 하며 쇳소리를 내는 아이들을 보며 극심한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져버렸다. 더 문제가 커지기 전에 빠르게 입원이 가능한 병원을 알아봐야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뛰어난 검색 능력을 가진 남편이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무서운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난 폐렴 환자들 사이에서 베드를 넣고 빼가며 나만의 공간을 마련했고 그들을 간호했다. 경과가 좋다는 의사의 말에 입원 6일 만에아이들은 병원과 작별할 수 있었지만, 나에게 발현된 폐렴 증상 탓에 나만큼은 병원과 헤어지지 못했다.
큰 일을 겪으며 뒤통수를 제대로 맞고야 말았다. 누군가 나에게 정신 좀 차리라며 등짝 스매싱을 제대로 갈긴 느낌이랄까. 내가 이토록 아이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야 했다. 단순히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던 욕심은 아니었다. 떠올려야 했다, 과거의 나를 말이다. 학창 시절에 대한 아쉬움, 그때 못다 핀 꽃을 첫째를 통해 피우고 싶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