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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별 Oct 16. 2024

치유와 성장의 글쓰기 3

비로소 완성되어 가는 나


전학을 갈 수 없으니, 빨리 졸업이라도 해버려야지 싶었다. 그들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괴롭힘의 정도는 점차 시들해지긴 했지만, 난 여전히 그 무리를 피해 다녀야 했다. 학교에 미련이 없었고, 공부가 즐겁지 않았다. 혹여 내가 좋은 성적을 받거나, 바닥을 치면 또다시 말도 안 되는 루머가 퍼져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떤 쪽으로든 튀고 싶지가 않았기에 중위권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다시 그때의 일로 마음을 다쳐서는 안됐다. 세상을 등지는 그런 일은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하고 싶던 게 없었으나 그나마도 배우고 싶어 했기에 미용 전공을 선택했다. 4년제 대학교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기에 지원자가 적다고 했다. 안전빵으로 수시 모집 원서를 냈던 그곳이 나의 대학교가 되어버렸고, 난 오전 수업만 마치고 집으로 가는 특혜를 얻었다. 다들 오랜 노력 끝에 진정으로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때, 난 도망치듯 원서를 냈고 덜컥 합격 통보를 받았다.


새로운 공간과 환경 속에서 난 쉽고 빠르게 적응했다. 입학 전 참석했던 오리엔테이션에서 평생의 짝꿍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언제나 한결같이 내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그들이 있기에 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베스트 프랜드를 자처하는 고마운 친구들이다. 이전과는 달리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니, 학생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당연했고 공부하는 일이 즐거움으로 느껴졌다. 1학년 초부터 우수한 성적을 받기 시작했고, 점차 공부하는 방법을 깨달아갔다. 그렇게 3년간 장학금을 타며 난생처음으로 부모님에게 효도 비슷한 걸 해보는 유쾌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좋은 성적을 받을수록 공부가 재미있었다. 친한 친구들에게 필기 노트를 빌려주고 그들이 좋은 성적을 받을 때면 전에 없던 큰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1년간 어학연수도 다녀와 영어도 곧잘 했기에 좋은 토익, 스피킹, 라이팅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높은 학교 성적과 영어 점수, 100시간이 넘는 통역 봉사활동 경험은 미래의 나에게 열릴 기회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갖게 만들었다.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높기만 한 대기업의 문을 열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래서일까, 공부의 즐거움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내 인생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버렸다.




첫째는 성장 발달 속도가 굉장히 빠른 아이였다. 키도 컸고 말도 빨랐으며 놀라운 이해력과 습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흡수력이 뛰어난 스펀지 같은 아이였다. 가족들의 권유로 어린이집을 보내지 않았고 가정 보육을 했기에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한 자리에 앉아서 무언가를 진득하게 하는 걸 싫어하던 아이라 그 흔한 학습지조차 구독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냥 책만 읽어줬을 뿐인데, 생후 32개월(만 2살)부터 한글을 읽기 시작했다. 엄마와 할머니가 읽어주는 내용을 눈으로 함께 따라가다 보니 저절로 외워진 듯했다. 그럴 만도 했던 게 하루에 30~40권의 그림책을 봤고, 1 권당 30~50번은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같은 책을 수십 번 반복해서 읽어주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아이의 기쁨은 곧 나의 행복이었다. 그때의 반복 독서가 한글을 빠르게 떼는데 가장 큰 힘이 되어줬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억지로 강요하는 건 절대로 하기 싫어했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놀이를 고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기에 내 할 일은 오직 책을 읽어주는 게 다였다.


그래서였을까, 자꾸 아이에게 기대를 걸게 되었다. 이전과는 달리 초등학생이 되니 끌어주는 대로 곧잘 따라와 줬다. 책을 많이 본 덕에 배경 지식이 풍부했고, 뭐든 빠르게 이해하고 기억했기에 큰돈을 들여서라도 중요한 시기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배움에 큰 즐거움을 느꼈지만, 너무도 늦게 깨달아버린 탓에 후회가 크게 남았던 지난 학창 시절에 대한 미련 탓이었던 것 같다. 그때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첫째에게 지식을 주입하길 강요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모든 분야에서 잘 해내길 바랐고, 이 아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첫째에게 심한 폐렴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난 멈출 생각이 없었고, 그래야 한다는 생각조차 해보질 않았다.


때는 작년 5월, 유아 감기 환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의사는 병실 부족을 이유로 입원 허가도 한 번에 낼 수 없다고 했다. 우선 대기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라고 했다. 며칠 뒤 다시 찾은 병원, 증상의 악화로 즉시 입원일을 받을 수 있었다. 시름시름 다 죽어가던 아이들이 이제야 살겠구나 싶어 쾌재를 불렀다. 오랜만에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용하다는 소아과를 다 다녔지만 낫지 않았고, 폐렴 증상이 있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였기에 입원 수속을 밟는 과정 또한 굉장히 까다로웠다. 코를 몇 번이나 찔리고 나서야 병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일주일 만에 호전된 아이들은 다시 태어난 듯 보였다. 이전처럼 생기 넘치고 발랄한 모습에선 새콤달콤한 향기가 났다. 이제 막 영글은 사과처럼 아이들이 싱그럽게만 느껴졌다. 향기 가득한 그 열매를 더는 시들거나 썩어가게 둬서는 안된다며 각성해야 했다. 내가 더 미쳐가기 전에 신경정신의학과라도 찾아가 치료를 받아야 할까를 넌지시 남편에게 얘기해 봤다. 자신이 보기엔 전혀 문제가 없다며, 엄마로서 잘하고 있다는 격려로 날 위로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은 나의 것이기에, 내가 가장 잘 알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그 마음을 꺼내어 놓고 제삼자가 되어 바라보기로 했다. 과거의 내 모습을 다른 시각을 통해 관찰하며 스스로를 치유해 보기로 결심했다. 조금 멀찌감치 떨어져 나를 바라보는 그런 노력 말이다.


외롭고 추웠던 유년기, 마구 짓밟혔던 학창 시절, 온전치 못했던 부모와의 관계 등을 백지 위에 끄적끄적 그려보기 시작했다. 슬펐고, 억울했고, 죽고 싶었던 감정들을 심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꺼내보았다. 다 지워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는 사실에 순간순간 놀라야 했다. 왜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을까, 어른들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다들 침묵했다. 몇 번이고 상담을 진행했기에 학교 선생님들은 내가 따돌림을 당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르쇠로 일관했다. 학교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 조금 더 관심을 갖고 날 지켜봐 주지 못했던 부모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공기 방울처럼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알아차렸을 때 톡 하고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한 발 물러 서서 멀리에서 바라보니, 당시의 나에게 부족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서진 퍼즐을 맞추듯 하나둘 채워가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활동인 글쓰기를 통해서 말이다.


나에게는 키다리 아저씨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내 상황을 공감하고 위로하며 헤쳐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는 그런 어른 말이다. 내가 그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주기로 했다. 그때의 소녀에게 나라는 어른이 많이 외로웠겠다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힘든 그 시간을 잘 견뎌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고 괜찮냐며 안부를 물었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두려움에 꽁꽁 감춰둬야 했지만 막상 꺼내어 바라보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리고 그것들에 관해 쓰다 보니 나의 부족한 점을 찾을 있었고, 읽다 보니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단점은 고치면 됐고, 들키기 싫다면 숨겨놓으면 그만이었다. 늦었지만 비로소 내가 완성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소녀를 위로함과 동시에 내가 꽤 괜찮은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글을 쓰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었고,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커져갔다. 그리고 결국 난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을 찾기보단 아이들에게 무해한 엄마가 되는 길을 택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좋아하는 걸 찾고 잘하는 걸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말이다.


글쓰기는 나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수단임과 동시에 어제보다 나은 엄마가 될 수 있는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되어주었다. 쓰다 보니 비로소 완성이 되어가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오늘도 글을 쓴다. 완성을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는 난 여전히 미완성 어른이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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