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눈앞이 환해졌다. 거실에서 자고 있는 할머니와 나를 깨울 사람은 단 한 명. 오늘 밤도 잠은 다 잤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레 켜진 거실 전등 탓에 미간을 찌푸리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봐야 했다. 아직 다 뜨지도 못한 눈동자에 비치는 휘청거리는 아버지의 모습, 그리고 오른손에 들린 소주 한 병. 곧이어 알코올 냄새가 방 안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소주를 마시다 실수로 옷에다 콸콸 부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의 입 속에서 튀어나온 비릿한 썩은내와 알코올 냄새가 섞여 만들어진 환장의 하모니,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역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애비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새끼라는 놈은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고 말이야!"
잠이 덜 깬 두 눈을 비비다 말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매일같이 술냄새나 풀풀 풍기며 새벽에나 들어오는 저 사람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에, 나에게 아들 노릇을 과하게도 바라고 있는 저 태도에 어이가 없어서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뻔뻔함이 도를 넘어선다.
"풉."
"뭐야, 너 지금 웃냐? 웃음이 나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조용히 웃어봤지만, 그만 소리가 새어 나와버렸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껏 그래왔듯 죽을힘을 다해 더 참았어야 했다.
"어디 갔어? 저 새끼를 그냥..."
쾅하는 소리와 함께 소주병을 식탁 위에 내려둔 그는 집안 곳곳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다음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진 할머니는 느린 걸음으로 아들을 따라다녔고, 그를진정시키고자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러지 말라며, 동빈이가 나쁜 뜻으로 웃은 게 아닐 거라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심이 선 모양인지어디선가 야구 방망이를 하나 들고 나왔다. 얼마 전 담임 선생님에게 선물 받은 배트였다. 저건 안되는데...
"동빈아, 아부지한테 잘못혔다고 빌어."
"... 그거 제 거예요. 학교에서 선물 받은 거라고요."
할머니는 그가 폭주하는 걸 막고자 했지만, 난 내 소중한 배트가 망가지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야구공 하나 사 준 적 없으면서 대체 무슨 권리로 그러느냐는 말이다. 주먹을 꽉 쥔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게 요절이라도 난다면 내 마음도산산조각 날 것 같았다. 차라리 주먹으로 내 얼굴이나 서너 대 치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퍽-.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눈이 제대로 돌아버린 그가 크게 휘두른 야구 방망이의 끝엔 할머니가 있었다. 목표물은 나였는데, 피해자는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날 감싸 안았던 할머니의 손과 팔이 스르르 풀려버렸고, 쿵 소리와 함께 바닥이 크게 울렸다.
"할머니!"
눈을 감은채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 할머니를 흔들며 깨워보지만의식이 없다. 이럴 땐 어디로 전화를 하는 거랬지. 119였나, 112였나.. 휴대폰을 찾는데 보이지가 않는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개똥보다 못한 고물 휴대폰이 이토록 절실히도 필요해진 때가 왔는데 왜 보이지 않는 거냐고. 잠시 후 휴대폰을 발견한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에 연결된 충전기를 뽑고 119를 차례로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들려오는 그 순간 난 보았다.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으며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할머니는 산소 호흡기를 꽂은 채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구급 대원 중 한 분이 머리를 다친 건 아닌지를 물어왔지만, 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모르겠다며 고개를 좌우로 저어야 했다. 그가 나를 향해 방망이를 휘두를 때, 눈을 찔끔 감아버렸기에 할머니가 어디를 가격 당했는지 보질 못했기 때문이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로 목 주변이 다 젖어가는 줄도 모른 채, 할머니의 차가워진 손만 부여잡고 있어야 했다. 다들 괜찮을 거라고 걱정 말라고 했지만, 좀처럼 진정할 수 없다. 온기를 잃어가는 할머니의 모습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에게 또 한 번 실망하고야 만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다신 겪고 싶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해야 했다.
응급실에 도착하니 의사 선생님이 상황을 물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제서야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저런류의 동정의 눈빛은 정말이지 혐오스러웠다. 자신이 나보다 조금 더 나은 환경과 위치에 있으니 불쌍한 날 돕겠다는 듯한 말투와 눈빛을 보내왔다. 그것들은 언제나 작위적이면서도 위선적이었다. 갑작스레 거북함이 몰려와 참을 수가 없던 나는 다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모두 게워내야 했다.
"없어요, 보호자. 할머니를 저렇게 만들고선 도망갔어요."
"그럼 혹시 다른 보호자는 없니?"
다시 돌아온 나에게 MRI, CT 등 모르겠는 의학 용어들을 나열해 가며 보호자를 물어오는데, 가해자는 도망가서 안 올 거라고 했더니 다른 보호자를 묻는다. 뱃속을 다 비워냈음에도 답답함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고구마를 스무 개쯤 물도 없이 먹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저런 멍청한 머리로 어떻게 의사가 되었을까 싶어 짜증이 확 몰려왔다. 보호자가 없으니 학생인 내가 동행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 안 하는 걸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참아가며 내가 보호자라는 걸 강력하게 어필해 보지만 법이 그렇단다. 결국 아버지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단다. 뇌든 척추든 어디가 손상되었는지를 정밀히 확인하고 수술하려면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본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통화 연결음이 끊기질 않는다. 애초에 우릴 걱정할 사람이었다면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겠지. 예상을 전혀 빗나가지 않는 그의 행동에 난 또 갈길을 잃어버렸다. 할머니의 검사와 치료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사람이라는 사실에 오늘도 난 와르르 무너지고야 만다. 야구 방망이 따위가 뭐라고 일을 이렇게 크게 키워야 했을까. 그러지 말걸 그랬다. 아니,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할머니 말처럼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서라도 그에게 빌고 또 빌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