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유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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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쫄딱 맞고 들어왔지만 따뜻한 물로 반신욕도 했고, 감기약도 미리 먹어둔 덕인지 감기가 찾아오지는 않았다. 공부는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 같은 거라고 했다. 체력이 대학을 결정한다는 말을 귀에서 피가 나도록 들어왔기에 나에게 공부 머리뿐 아니라 몸 관리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오랫동안 필라테스와 수영을 하며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점진적 단계를 밟아왔다. 그깟 비 따위 탓에 지지 않을 수 있음에 감사했고, 그동안의 노력이 절대 헛되지 않았음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지금처럼 지치지 않고 나아간다면 나에게 서울대 법대 입학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엄마처럼 수석 입학은 아니더라도, 차석 입학이라는 타이틀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괜스레 웃음이 났다.
오늘 배웠던 내용들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반드시 복습이 필요했다. 장기 기억 공간으로 들어가지 못한 오늘의 기억들은 70% 이상 소멸이 될 테고, 또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버리면 80% 이상 지워지게 될 테니 말이다. 그래서 당일 복습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지켜야 하는 나만의 철칙이 되어버렸다. 운이 좋게도 차가 막히지 않아 오늘은 집에 10분이나 일찍 도착할 수 있었고, 저녁을 많이 먹어 배가 고프지 않아 간식을 먹지 않았으니 또 10분을 번 셈이다. 그래서 아직 8시 40분밖에 되지 않았으니 어제의 불행이 오늘의 행운의 씨앗을 틔운 셈이라고 봐도 되겠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 옛 선조들의 지혜로움에 찬사를 보내 본다. 지금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인 10시까지 장장 80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다. 그 긴 시간 동안 꼼꼼하게 오늘의 복습을 하고, 틈틈이 해오던 중간고사 준비까지 마치고 자러 가야겠다.
편안한 음성, 기분 좋은 향기가 내 온몸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음이 느껴진다. 묵직함이 제법 느껴지는 눈두덩이에 억지로 힘을 줘가며 양쪽 눈을 차례로 떠본다.
"... 엄마? 엄마다!"
암막 커튼 뒤 옅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걸로 봐선 아침이 확실하다. 평일 아침 엄마가 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기쁨이 공존한다.
"엄마, 오늘 사무실 안 가요?"
"오늘 하나의 첫 중간고사잖아. 떨릴까 봐 엄마가 응원도 해주고, 맛있는 아침도 차려주려고 아직 안 갔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내가 받아왔던 스트레스를 숫자로 환산한다면 무한대(∞)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사람이 엄마라는 사실에 가슴이 따뜻해지기 시작한다. 외로움과 고독의 길 옆에선 언제나 엄마가 함께 뛰고 있었음을 상기시켜 본다. 그 덕분에 힘들어도 견딜 수 있었고, 밝은 내일을 그릴 수 있었음을 말이다. 항상 내편이 되어주는 엄마가 있었기에, 난 언제나 주인공일 수 있었다.
"하나야, 너네 가족은 2명이 다야?"
가족사진을 예쁘게 오려 프레임을 끼우고 액자를 만들어보는 미술 시간. 내 사진을 힐끔힐끔 보던 옆 자리 수아가 물어왔다. 손바닥을 활짝 펴고 최대한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사진을 다 커버하기에는 내 손바닥은 충분치 않았던 모양이다. 호기심 여왕 수아의 레이더망에 나의 가족사진이 제대로 꽂혀버렸다.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수아의 가족사진에는 엄마, 아빠, 수아, 동생 그리고 할머니도 보였고, 강아지도 보였다. 수아는 가족 부자였구나.
"근데 아빠는 어디 갔어?"
내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자 수아는 다시 물어왔다. 아빠가 왜 없는지를 묻는 건지, 어디를 간건지를 묻는 건지 사실 잘 모르겠다.
"아빠 없어."
"응? 아빠가 왜 없어?"
곤란했다. 나도 모르겠는걸 자꾸 수아가 물어오니 손바닥이 흥건하게 젖어왔다. 지나가던 담임 선생님이 비어 있던 내 옆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의자가 선생님보다 한참이나 작아 엉덩이 한가운데를 잘 맞춰 앉아야 했다.
"이건 진짜 비밀이니까 수아만 알고 있어야 해. 사실 하나 아빠는 비밀 요원이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을 쓰는 일을 하시지. 슈퍼 영웅이라고나 할까? 쉿! 절대로 다른 친구들한테 말하면 안 돼. 비밀이 새어나가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거든."
수아의 입술 위로 길게 펼친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얘기하던 선생님은 나를 향해 한쪽 눈을 감으며 찡긋 하고 웃어 보였다. 아빠가 비밀 요원이라고? 처음 듣는 선생님의 말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수아가 엄지 두 개를 치켜올리며 멋지다고 칭찬하는 모습에 괜히 우쭐해졌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이 내 아빠라니!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아빠가 슈퍼 영웅이라니, 유하나 진짜 부럽다. 그럼 너도 슈퍼 영웅의 피가 흐를 거 아냐. 난 이제 항상 하나 옆에 딱 붙어 있어야겠다!"
몇 년이 지나서야 안 사실이지만, 이 모든 건 엄마가 짠 시나리오였다고. 사건이 생길 걸 대비하여 미리 대본을 쓰고 감독을 했던 엄마, 그리고 열연을 펼쳤던 선생님과 상황 속에 푹 빠져버린 우리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엄만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똑똑.
아침을 다 차렸으니 맛있게 먹으라는 엄마의 신호. 엄마가 테이블을 두 번 두드렸다. 김이 폴폴 올라오는 막 지은 쌀밥, 살짝 매콤하지만 시원함이 감도는 콩나물국 그리고 짭짤 쫄깃한 매력의 소고기 장조림까지. 이 환상적인 조합은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날 위해 없던 음식 솜씨를 총 동원했을 엄마를 생각하니 코 끝이 찡해왔다. 그 어떤 화려한 요리보다 지금의 조촐한 한 상이 훨씬 값어치 있음을 난 알고 있었다. 엄마의 사랑을 가득 털어 넣은 음식을 먹은 덕일까, 중간고사 기간 내내 막히는 문제 하나 없이 술술 풀어낼 수 있었다. 전 과목 만점을 기대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 가져봤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시험 결과가 나왔다. 선생님은 자신의 자리로 한 명씩 불러가며 총점과 석차를 알려주었다. 위아래를 가린 채 오로지 한 명만의 성적만을 보여주는 생각보다 번거로운 작업이었음도 선생님은 지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긴장의 연속이었고, 꽤 많은 칼로리가 소모되는 작업이었다. 기다림 탓이었을까 아니면 기대보다 저조한 결과 탓이었을까, 되려 지치고 힘들었던 건 우리들이었다. 말도 안된다며 자신의 점수가 맞는지를 수차례 되묻던 아이도 있었고, 머리를 잡아 뜯으며 엄마한테 죽었다고 혼잣말을 되뇌었던 아이도 있었다.
"유하나."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렸다. 설레는 마음 한가득 안고 선생님을 향해 발을 내딛어 본다. 이어 교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 노력하지 않아도 내 귀에 꽂혀버리고야 만다.
"부럽다. 하나가 이번에도 1등이겠지?"
"말이 되냐, 저게 진짜 사기캐지."
예상은 적중했다. 어김없이,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1등을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전교 1등'이라는 수식어가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점수와 석차를 보여준 뒤 선생님은 속삭이듯 나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고, 난 그런 선생님에게 감사하다는 목례를 보냈다. 처음 받아보는 전 과목 올백이라는 결과는 짜릿했고 달콤했다.
그날 저녁, 학원 수업이 없던 날이라 오랜만에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와의 조촐한 파티를 준비하기로 했다. 축하받을 사람은 나였지만 그렇게라도 엄마의 퇴근을 앞당길 수만 있다면, 파티의 주최자가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동안 타이트하게 용돈을 사용해 온 덕에 엄마가 좋아하는 치즈케이크와 샤인머스캣도 살 수 있었다.
'엄마, 중간고사도 1등이에요. 한 문제도 틀리지 않았어요. 오늘 저녁에 파티하고 싶은데 일찍 올 수 있어요?'
엄마에게 카톡을 날렸다. 숫자 1이 사라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중간고사 등수를 기다리던 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초조함이 느껴졌다. 더불어 기지개 한 번 편히 켜지 못하고 바쁘게 일하는 엄마가 일정을 변경하고자 수차례 전화를 걸어가며 양해의 말을 전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찡하게 아파왔다. 그럼에도 오늘만큼은 엄마가 꼭 필요했다. 그동안의 수고에 나를 토닥여 줄, 1등이라는 자리를 다시금 지켜낸 나를 쓰다듬어 줄 엄마가 말이다.
'역시 내 딸이라니까. 7시까지 들어갈게. 이따 보자.'
저녁 7시, 엄마의 귀가 시간을 통보받았다. 아마 나는 파티를 준비하는 5시부터 행복해지겠지. 6시부터 설레기 시작할 것이고, 7시부터 기쁨으로 가득 채워질 나를 상상해 본다.
저녁 6시 45분, 카톡이 울렸다. 평소처럼 광고 메시지가 왔을 거라고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휴대폰을 열어보았다.
'딸, 어떡하지. 갑자기 중요한 손님이 와버려서 갈 수가 없네. 정말 미안. 이번주 일요일에는 꼭 시간 낼게. 하나가 가고 싶어 하던 뮤지컬 <비밀의 화원> 보러 갈까? 마침 좌석이 생겨서 예약해 놨어.'
행복한 설렘 향기가 흩뿌려진 방 안이 일순간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검뿌연 안개가 깔린 듯 깜깜해졌고, 매캐한 냄새 탓에 눈이 시려 왔다. 온기를 머금은 물방울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더니 이내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고, 난 또다시 우산 없이 소나기를 만나고야 말았다. 그렇게 나의 모든 순간은 일시 정지해 버렸다.
* 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