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은 언제나 고요했다. 토요일까지도 일을 해야 하는 엄마는 피로가 쉽게 풀리지가 않는다며 일요일 아침 반드시 늦잠을 자야 했다. 엄마를 위해 오랜만에 아침을 차려보기로 했다. 간단하지만 사랑을 듬뿍 담은 계란프라이와 소시지를 굽고, 리코타 치즈를 올린 샐러드를 만들기로 했다. 난 언제나 엄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요리를 해 먹을 줄 아는 유치원생이었고, 초등학교에 입학 후 공부를 할 때도 그러했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시작했던 공부가 적성에 잘 맞았고, 성적표를 보며 기뻐하는 엄마의 자랑이 되고 싶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모르는 아주머니들이 말을 걸어올 때도 '전교 1등'이라는 수식어가 빠진 적이 없었고, 친척들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엄마를 향해 무수한 칭찬이 쏟아졌다. 혼자서 어떻게 아이를 그리 잘 키워냈냐고, 하나는 뭘 해도 될 아이라면서 말이다. 그런 말을 듣는 게 좋았다. 나의 부족한 부분들이 티 나지 않게 살포시 채워져 가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쏟아지는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아빠 없는 아이.' 난 그 말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었다. 아빠는 나에게 옵션이 아니었다. 태어나보니 없었기에 아빠에 대한 환상도, 그리움도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색안경을 끼고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수백, 수천번을 괜찮다고 말해도 나에게 쏟아지는 어른들의 동정의 눈길 말이다. 그래서 더 독하게 공부해야 했다. '전교 1등'의 수식어는 '아빠 없이 자란' 보다 더 우세했기에, 나의 환경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그럼에도 1등을 놓치지 않는 대단한 아이라며 모두가 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사람들은 내가 가진 것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음을 부러워했다. 불우한 아이를 보듯 안타깝게 바라보던 부정적인 시선보다, 부러움의 대상으로서 나를 바라봐주는 긍정의 시선이 좋았다. 그렇기에 단 하루도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었다.
"하나야, 이거 집에 가서 아빠랑 엄마랑 먹어."
"하나 아빠 없잖아."
일주일 넘게 유럽 여행을 다녀온 찬영이가 선물을 내밀었다. 스위스에서 사 온 초콜릿인데 양이 많으니 가족들이랑 나누어 먹으라는 말이었다. 그 예쁜 마음을 고맙게 받으려던 찰나, 우리 집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소희가 끼어들며 내 대답을 가로챘다. 우리 집엔 아빠가 없다는 말을 굳이 꺼냈어야 했을까.
"하나야, 몰랐어. 미안. 그럼 엄마랑 둘이 먹으면 되겠다."
찬영이는 선물을 주고도 되려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에 당황한 듯 식은땀을 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얄미운 성소희. 찬영이를 좋아하는데 자신은 선물을 받지 못해서 심술이 난 모양이다. '너만 알고 있어.'라며 속삭이던 소희의 비밀을 지금 이 자리에서 폭로해 버릴까 잠시 고민해 본다.
"괜찮아, 감출 일도 아닌데. 초콜릿 고마워. 맛있겠다."
입 안 가득 맴돌던 소희의 비밀은 결국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냥 꿀꺽 삼켜버렸다. 약속을 해버렸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줘야 했다. 소희의 말에 속상했고 서운했지만 그래야 했다.
유치원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오늘도 난 혼자서 내려 집으로 걸어야 한다. 버스가 멈추면 모두가 엄마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선생님 손을 잡고 내렸지만, 난 그럴 수가 없다. 소희의 말을 마음에 담아둔 건 아니었지만 머릿속에서 떠나보낼 수가 없다. 미워하지 않으려 했는데, 자꾸만 소희에 대한 미움이 커져만 간다. 소희가 엄마를 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소희보다 버스에서 먼저 내리기로 했다. 생전 처음으로 거짓말을 위한 용기를 내봤다.
"선생님, 엄마가 회사 근처에서 내리래요. 엄마 만나서 집에 갈게요. 여기서 내려주세요."
선생님은 다행스럽게도 엄마에게 확인 전화를 하지 않았다. 항상 혼자 내려서 집에 잘 들어갔었기에, 그간의 신뢰가 나에 대한 믿음으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천만다행이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그냥 걸었다. 처음 와보는 동네였지만 버스가 떠나버린 방향으로 가다 보면 우리 집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더위였다. 유일무이한 존재인 태양이 자신이라는 걸 자랑하듯 강렬함을 내뿜고 있었고, 그런 이유로 타들어가는 뜨거움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한 장소를 찾던 중, 편의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딸랑.
편의점으로 들어서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어른들이 살 것 같다는 표현을 종종 쓰던데,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를 배웠다. 죽을 뻔했는데, 이젠 살겠구나 싶었다. 아이스크림 코너가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니 지난 주말 엄마랑 사이좋게 나눠 먹었던 쌍쌍바가 눈에 띄었다. 함께 먹을 사람은 없지만 혼자서 다 먹기에 많지 않은 양이라고 생각했다. 계산대로 가서 결제를 하고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메고 있던 가방을 바로 옆 의자에 올려놓고 쌍쌍바를 반으로 쪼갠 후 하나를 덥석 무는 순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한 아이가 보였다. 아무런 표정 없이 넋 놓고 나를 쳐다보는 남자애가 유리창 밖에 서 있었다. 건너편 건물 뒤에 숨어 있었지만 내 눈엔 그 애만 보였다. 쌍쌍바 한 줄을 다 먹을 때까지도 내 앞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나만 바라보는 아이. 날 아는 건가?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가방을 메고 남은 쌍쌍바를 들고 편의점 밖으로 나가보았다.
"혹시 나 알아?"
천천히 다가가 물었다. 계속 날 쳐다본 이유가 뭐냐고 묻기엔 당황스러울 것 같아, 날 아는지를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더 다가가니, 내가 아닌 아이스크림을 쳐다보는 건가 싶다.
"이거... 먹을래?"
그 애 앞으로 아이스크림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 질문에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나 하나 먹었어. 하나는 너 먹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내밀어 쌍쌍바를 받아갔다. 그래서 볼 수 있었다. 그 아이의 팔에 있던 서너 개의 멍 자국을.
"팔에 든 멍은 언제 생긴 거야?"
허겁지겁 먹기 바쁘던 아이가 갑자기 먹던 걸 멈추고는 처음 입을 열었다.
"야구. 야구 자주 하거든. 달리다 넘어졌어."
"야구를 좋아하는구나? 좋겠다. 좋아하는 것도 있어서."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남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에 꿀꺽 삼켜버리는 아이. 먹는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아졌다. 겨우 쌍쌍바 반쪽을 먹었음에도 이상하게 배가 불러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먹방을 보는 건가보다.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가방 속에 들어있는 초콜릿이 불현듯 떠올랐다.
"초콜릿 좋아해?"
이번에도 그 애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지퍼를 열어 찬영이가 준 선물을 꺼냈다. 찬영이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더 맛있게 먹어줄 수 있는 사람에게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이걸 다?"
이번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격한 긍정의 표현이었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바로 포장지를 뜯고 세 개를 한 입에 구겨 넣었다. 입이 참 큰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건 집에 가서 먹어도 돼?"
오물오물 초콜릿을 씹으며 집에 가져가겠다고 말하는 아이. 맛있는 걸 가족과 나눠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이 예쁘게만 보였다.
"당연하지. 가져가. 난 초콜릿 안 좋아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더니 뭔가를 꺼내 손바닥을 활짝 펼쳐 보인다.
"이거......"
큼지막한 해바라기가 있는 똑딱 핀 하나였다.
"예쁘다. 이거 나 주는 거야?"
"응. 엄마 주려고 샀는데, 못 만났거든."
집에 머리띠며 고무줄과 핀이 수십 개가 있었지만, 해바라기 핀은 없었기에 가지고 싶었다. 무엇보다 노랗게 활짝 핀 꽃이 꼭 나를 보며 웃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고마워."
앞머리를 들어 올려 건네받은 핀을 꽂아보았다. 더위가 한결 가신 느낌이었다.
"예쁘다."
나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그 애의 모습을 보니,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더 있다가는 얼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 대충 인사를 던지고 집으로 달려가버렸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던 하원길, 나를 보며 웃어주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기에 오늘 하루는 특별했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하나야, 오늘 이 핀 하고 가면 어때?"
엄마와의 데이트. 오랜만의 외출에 엄마도, 나도 설레이기 시작했다. 어떤 옷을 입을까, 어떤 핀을 꽂을까, 어떤 구두를 신을까를 함께 고민하는 그 시간이 정말로 소중하게 느껴졌다. 엄마가 얼마 전에 백화점에서 사 온 연한 핑크빛의 무광 머리띠를 가리키며, 오늘 원피스와도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한 하루가 되어야 하기에 노란색 해바라기 핀을 골랐다. 이 핀을 하는 날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겼기에, 촌스럽다며 그 핀은 그만 좀 하라는 엄마의 핀잔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강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레스토랑. 주문한 메뉴들이 차례로 나왔다. 치즈가 무려 네 가지나 올라가는 포르마지 피자는 언제 먹어도 맛이 좋았다. 엄마가 시킨 안심 스테이크까지 서너 점을 집어 먹고 나니 배가 금세 불러왔다. 식사를 하며 그동안 모아 왔던 학교와 학원에서의 에피소드들을 몽땅 풀어냈다. 엄만 내 이야기가 재미있었는지 배꼽을 잡고 깔깔거리며 웃다가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버렸다. 엄마를 울고 웃길 수 있는 나 자신이 조금은 멋지다고 느껴졌다. 지난번 열심히 준비했던 홈 파티는 열지 못했지만, 오늘의 데이트는 꽤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다.
"짠, 공부하느라 고생한 하나를 위한 선물! 전 과목 만점은 또 처음이잖아. 잘했어, 우리 딸. 정말 대단해."
엄마가 주먹을 활짝 펼치니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찰랑하고 아래로 늘어졌다. 목걸이? 얇은 골드 체인에 작은 다이아가 한가운데 콕하고 박혀 있는 하트 모양 펜던트 목걸이였다. 취향을 제대로 저격당해버린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엄마......"
"급하게 이거 구하느라 백화점 몇 군데나 전화를 돌려야 했는지 몰라. 정말이지 힘들었다니까."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 목걸이를 구하기 위해 엄마가 애쓰는 장면들이 생생히도 머릿속에 그려졌다. 목걸이가 예뻐서라기보다 엄마가 부단히도 펼쳤을 노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코 끝이 찡해오기 시작했다.
"고마워, 엄마. 정말 너무 예쁘다. 눈이 부실 정도로."
"그치? 그럴 줄 알았어. 하나가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
잠시라도 엄마를 원망했던 때로 돌아가 그 시간들을 도려내고 싶었다.기다림의 결과가 이렇게나 달콤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마음을 조금 더 비우고 기다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값진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마지막까지 그럴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