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약이라는 말, 그건 다 거짓말이다. 나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대체 그런 말을 왜 만들어서는 괜한 기대를 하게 만드는 거냐며 이름 모를 그 사람을 탓해 본다. 고문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내 기분을 절대 알지 못할 거다. 내일은 그래도 괜찮아지겠지, 모레는 지금보다 덜 아프겠지 하는 그런 희망 고문 말이다. 그게 오로지 희망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아침이 오면 어김없이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야 했다. 얼마큼이나 들어갔는지 모를 정도로 깊고 깊은 슬픔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또 빠져야 했다. 그렇게 꺼져서는 차라리 한 줌의 흙이 되길 얼마나 바랐는지, 몇 번이고 꿈꿨는지 이젠 셀 수조차 없었다.
엄마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은 아버지를 향한 원망을 낳았고, 문득문득 떠오르는 엄마와의 추억들은 아버지와 내 사이를 어지간히도 불편하게 만들곤 했다. 그가 우리 곁에 처음부터 있어줬다면 어땠을까. 아마 엄마를 잃어버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 우리가 헤어지지 않아도 되었겠지. 엄마가 언제나 바빠야 했던 이유도, 나와 시간을 보낼 수 없던 이유도 모두 아버지의 부재였다. 나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끝까지 없었어야 했다고, 그랬다면 지금과도 같이 비난의 화살이 아버지를 향하지 않아도 됐을 거라며 그를 향한 원망을 수없이 쏟아 내 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분노에 치가 떨려왔다.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건 딱 두 가지였다. 엄마와 왜 헤어졌느냐고, 그리고 우릴 왜 버려야 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미 지나간 일인 데다 다시 돌이킬 수 없기에, 그럴싸한 변명만 잘 늘어놓는다면그를 용서할 수 있을것도 같았다. 난 과거의 일에 질척대는 그런 유의 사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아버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가 궁금해할것이라는 걸 알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말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유유자적 전원생활을 즐기던 중,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어쩔 수 없이 나를 도맡게 된 걸까.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전무하니 없던 책임감이나 부성애가 어느 순간 갑자기 생길 리도 만무했다. 자유로운 영혼의 양쪽 다리에 커다란 모래주머니가 채워진 그런 느낌이려나. 불편한 감정은 나만 품고 있는 게 아니겠구나. 그는 내가 미울 터이고, 원망스러울 터였다. 그렇기에 아버지도 나도 각자의 마음을 굳이 풀어헤친 채 그것들을 마주 세울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때를 뒤집어 까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더는 궁금해하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편이 나았기에 그래야 했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덕에 오랜만에 머릿속까지 맑아지는 듯했다. 이런 개운한 기분을 언제 또 느껴 봤던가 싶어 유사한 기억들을 소환하려 노력해 보지만 실패하고야 만다. 어떤 이유에서 일까,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랬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생각이 나질 않는다. 마치 오늘 처음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가을 하늘을 마주한 듯 달가웠다. 홀로 외로웠던 하늘은 반가운 마음에 같이 놀자며 나에게 살랑살랑 손짓을 했다. 간들거리는 바람 탓에 살짝 흔들렸으나 다시금 중심을 잡았다. 창문 너머의 공기, 온도, 계절은 방 안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에 굳이 밖을 나가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일요일을 함께 보내자고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똑똑.
"하나야, 약속 없으면 외식하러 나갈까?"
방문을 두드리고 잠시 뒤 들어온 아버지는 그 어떤 빌드업 없이 본론부터 내던졌다. 집이 아닌 밖에서 단 둘이 밥을 먹자는 말인가. 아버지와 단 둘이 무언가를 한다는 걸 상상하는 순간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의도하지 않은 무조건 반사가 만들어 낸 행동이었다. 왜 자꾸 그러는 거지. 얼마나 더 나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하는 걸까. 싫다는 말을 어떻게 에둘러 표현해야 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맑고 고요하던 나의 아침에 뿌연 안개가 들이닥쳤다. 고개만 도리도리 하면 될 일에 괜한 감정을 낭비하고 있는 내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대답을 위한 고민이 길어지자 아버지는 질문을 다시 회수해 갔다.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 다음에 날을 잡아 보자."
대체 나에게 무얼 기대하는 걸까. 이제 와서 아버지 노릇이라도 해보겠다는 건가. 겨우 삭이고 있던 분노의 감정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내 밑바닥의 추악한 모습까지는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지금의 시공간을 빠르게 벗어나야 했다. 날 좀 내버려 두라는 그 말을 목구멍으로 다시 삼키고는 그의 어깨를 스쳐 지났고, 현관에서 신발만 겨우 신은 채 문 밖을 나섰다.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