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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별 Oct 20. 2024

유하나│여름은 끝이 나고


소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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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오늘의 시작을 알리려는 듯 햇빛이 잘게 부수어졌고, 내 얼굴 위로 잔잔하게 쏟아졌다. 눈두덩이를 간지럽히는 그것들로부터 피하고자 양손을 올려 눈을 비볐다. 가려움이 조금은 가신 듯했다.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둔 휴대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7시, 평소보다 일찍 눈이 뜨였다. 헛된 하루가 또 시작이 되겠구나. 빈껍데기만 남아버린 나라는 몸뚱이에 환멸이 느껴졌다. 공부 그따위가 뭐라고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살았던 걸까. 심장 한가운데 자라난 염증은 쉽사리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져가는 듯하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계속 자라고 자라 커다란 암 덩어리쯤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꿈에서처럼 우리가 만날 수 있을 테니.


단 한순간도 머릿속에서 떠나보낸 적 없다. 시간이 갈수록 점차 희미해져 갈 것이 분명했기에, 어떻게든 꽉 붙들어 둬야 했다. 따스한 온기, 부드러운 손길, 언제나 산뜻하게 풍겨오던 살 냄새까지도 머릿속 깊숙이 간직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머리뼈 안쪽에 문신처럼 새겨 넣고 싶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수많은 추억들을 말이다. 이따금씩 희미해져 버린 기억들은 끝자락이라도 최선을 다해 잡아둬야 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었다.



"하나야, 잘 잤니?"


나에게 처음부터 없던,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아버지라는 사람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엄마의 발인 당일이었다. 왜 일찍 나를 찾지 않았느냐고, 무슨 이유로 엄마와 나를 버린 거냐고 따져 물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방문을 열고 나온 나를 발견한 아버지는 아침 인사와 함께 언제나처럼 떡메모지와 검은색 볼펜을 식탁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당연하게도 질문은 아버지의 몫이었고, 난 짧은 단어들을 하나둘씩 써내려 갈 뿐이었다.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리거나 좌우로 흔들어도 괜찮은 질문이 나올 때면 괜스레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어떤 대답을 써야 할지 고민하며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되었기에. 나의 끄덕임을 확인한 아버지는 아침밥을 식탁에 올리는 것을 끝으로 더는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우린 조용히 마주 보고 앉아 새우가 서너 개 올려진 볶음밥을 먹기 시작했다. 짜지 않게 적당히 간이 잘 베인 꼬들밥 덕인지, 제법 통통하게 살이 오른 새우살 덕인지 이상하게 입맛이 돌았다. 입이 벌어지고 닫히는, 이가 딱딱 맞닿는, 잘근잘근 다 씹은 음식물을 삼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늘 그랬듯 오늘의 부엌도 고요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릇의 바닥이 훤히 보였다는 점이다. 민낯을 들킨 기분이 들어 빨리 식탁을 떠나야 했다. 다 쓴 숟가락을 식탁 위로 내려놓고, 휴지로 입을 닦고 나서야 아버지 입가의 엷은 미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엄마가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가장 좋아했던 여름이 끝나자마자 쓸쓸함을 몰고 가을이 찾아왔다. 외로움을 견딜 수 없던 가을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엄마를 저 멀리로 데려가 버렸다. 내 목소리와 함께 말이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머리에 온 신경을 모아봤지만 소용없었고, 필라테스와 수영을 할 때처럼 최선을 다해 배에 힘을 주고 입을 벌려봤지만 소리 없는 함성만 발사될 뿐이었다. 바보이자 천치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전교 1등이라는 수식어, 과거의 영광은 잊은 지 오래였다. 아버지를 따라 들어와 살게 된 이 시골 마을과 지금의 내 모습이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가볍게 양치를 끝내자마자 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나를 바짝 따라붙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다리를 빠르게 움직여 본다. 나의 등굣길과 아버지의 출근길이 같다는 사실은 오직 우리 둘만이 아는 비밀이다. 우린 목적지가 같았다.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부녀 사이라니, 실상 나쁠 건 없었다. 다만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이 되어버린 우리의 관계를 아버지의 직장에 알리고 싶지가 않았다. 분명 나의 사연들을 미주알고주알 파헤칠 것이 뻔했기에 아버지에게 비밀에 부쳐 달라고 했다.




전교생이 50명도 되지 않는 이 작은 학교에서는 체육 수업을 언제나 함께 하곤 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운동장으로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무리를 짓고 까르르 웃고 떠드는 그들 사이 끼고 싶은 생각이 없던 나는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조금 멀찌감치 떨어진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50m 달리기 연습을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거짓말을 한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속도를 내야 하는 그 어떤 활동도 할 수가 없었기에, 내 선택이 옳았다고 느꼈다. 레인에 맞춰 번갈아가며 뛰는 활동을 보고 있자니 꽤 지루했다. 슬슬 하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운동화 속 발가락들을 까딱거리며 지루함을 달래 보려던 찰나, 내 발 옆으로 야구공이 데굴데굴 굴러왔다. 구르고 굴러 내 운동화를 톡 하고 건드렸다.


타타타탁.


저 멀리서 뛰어오는 남자아이 하나가 보였다. 글러브를 끼지 않은 다른 손으로 내 옆에 떨어진 야구공을 주워 올렸다. 처음 보는 얼굴의 야구부원이었다. 야구를 하는 아이답지 않게 얼굴이 하얗고 키가 작았다. 깡마른 체구 탓에 힘이라도 있을까 싶어 조금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누나, 미안해요. 혹시 맞지는 않았어요?"


누군가 처음 나에게 말을 걸어오면 당황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지금과 같이 마음이 예쁜 누군가가 질문을 해 올 때 말이다. 상냥한 질문에 친절한 대답을 돌려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기에, 난 오늘도 적잖이 곤혹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그 아이와 눈을 마주한 채, 고개를 위아래로 까딱거렸다. 그제서야 씨익 웃어 보이는 아이. 깊게 옴폭 패인 두 개의 보조개마저도 나를 보고 활짝 웃어주는 듯했다.


"휴, 다행이다. 근데 누나는 왜 달리기 안 해요?"


다시 돌아온 아이의 친절한 음성에 '난 말을 못 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내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일일 뿐, 현실 세계에선 불가능했다. 그 어떤 도구 없이는 내 몸뚱이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뼈저리게 느끼고야 말았다. 속이 상해 눈물이 핑 돌았다.


"자꾸 귀찮게 물어서 미안해요. 이거 먹으면 기분 좋아질 거예요. 그리고 내 이름은 지우에요. 1학년 민지우. 다음에 만나면 꼭 인사해 줘요!"


지우는 주섬주섬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손을 잡고 바닥을 열어 보라색 캐러멜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뛰어가 버렸다. 자신의 학년과 이름을 무심히 툭 던져 놓고는 말이다. 웃음이 터져버렸다. 밀가루 같던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진 것도, 당황스러운 얼굴로 땀을 삐질 흘리며 작은 선물을 건네고 도망가버린 녀석의 마음도 마냥 귀여웠다. 소리 없는 웃음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을 테니. 캐러멜을 까서 입에 쏙 넣어보았다. 달달한 포도향이 입속 가득 풍겼고,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웃고 나니 개운했고, 내가 웃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나의 여름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 사진 출처 : Pixabay, Krivitski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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