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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별 Oct 18. 2024

하동빈│내가 죽여 버릴게


소년

하동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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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비닐봉지를 양손 모두에 걸고 수십 개의 계단을 오르고 올랐다. 채소 몇 개 들어있는 게 다였기에 부피는 컸지만 가벼웠다. 날이 제법 선선해졌다. 땀방울이 두피에 송골송골 맺혔지만 멀리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덕에 더위를 느낄 새가 없었다. 바람은 땀방울들을 들고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씻은 듯 날아가고야 만다. 이제 정말 무더웠던 여름과 작별할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옥 같던 매일의 하굣길이 이렇게나 산뜻하게 느껴질 줄이야. 처음으로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어졌다. 마음을 졸여가며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됐고, 대문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잡다한 소음에 귀를 막지 않아도 됐다. 특히 그에게서 나는 역겨운 알코올 냄새를 억지로 참지 않아도 되었음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예상대로였다. 현관 앞부터 부엌, 거실, 안방까지 살림들이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이따금씩 깨진 물건들이 보이곤 했다. 바닥에 늘어진 옷가지 위로 유리 파편들이 튀어 있었기에 어떻게 치워야 하나 걱정이 먼저 앞섰다. 몇 벌 되지도 않는 옷들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리 조각들을 털어내야 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옷들을 몽땅 겹쳐 들고 현관 밖으로 나가 담벼락 위로 탈탈 쳐가며 파편들을 없애낼 수 있었다. 혹시나 뾰족한 유리들이 손을 다치게 할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털어 옷가지들을 들고 다시 거실로 돌아와 서랍장 위에 올려놨다. 


"하......"


전쟁의 잔해들이 나뒹구는 듯 지저분했고 어지러웠다. 언제나 뒤처리는 나의 몫이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상태가 심각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을 다 던지고 부숴버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여느 때보다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정신없는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던 중, 나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바닥의 유리 조각들 중 가장 커다란 조각을 들어보았다. 제법 날카로웠다. 손가락 하나쯤은 거뜬하게 베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혹시 이거...... 문득 떠오르는 생각, 그리고 이를 확인하고자 부엌으로 자리를 옮겨본다.




"이거면 되겠지."


할머니가 쓰는 칼들을 하나씩 차례로 들어 올리고 다시 넣기를 반복하며 날이 선 정도를 확인했고, 가장 길이감이 있는 놈으로 하나 집어 들었다. 할머니의 칼을 이런 용도로 쓰게 될 줄이야. 피식 웃음이 나와버렸다. 기껏해야 잘 불린 미역을 가위로 잘라 미역국이나 끓이고, 흐르는 물에 대충 씻어낸 파를 끓는 라면 위에 송송 잘라 넣는 게 다였던 나였다. 무섭다고 과일조차 깎아본 적이 없는 내가 칼을 쓰겠다며 이러고 있으니 말이다. 느닷없이 떠오른 망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라도 상관없다. 9년 전 날 떠나던 그날의 엄마, 그리고 나에게 했던 마지막 말을 십분 이해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엄마처럼 나도 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시궁창 같은 나의 오늘은 부푼 미래의 꿈을 품을 순 없었지만, 그저 내일을 살아가고 싶었다. 남들처럼 평안한 시간을 달리는 내일을 말이다. 


그렇기에 실패는 없어야 한다. 계획을 더 뒤로 미루다가는 할머니와 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결단을 내리는 게 맞다. 그가 죽거나, 내가 죽어야 한다. 그래야 지독하게도 질긴 그와 나의 악연을 끊어낼 수가 있다. 매일 술에 절어 있는 그를 찌르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미친 사람처럼 길길이 날뛰다가도 어느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히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한두 번 본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 선택의 결과는 내가 그리는 그림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의 숨을 단번에 끊어내기 위한 도구까지 챙겼으니 완벽했다.


할머니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 같이 고민을 해볼까도 생각해 봤다.  말만큼은 차마 꺼낼 수가 없을 것 같다. 무서웠고 두려웠다. 실행에 옮기지 못할 이유가 생겨버릴까 봐. 그래서 또다시 할머니를 지키지 못한 못난 멍청이가 되어버릴까 봐. 더는 후회만 일삼는 머저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식탁 한편에 쌓아둔 책을 하나씩 들춰가며 중간쯤에서 잘 쓰지 않는 노트 한 권을 꺼냈다. 내키는 대로 노트를 쫙 펼치고 종이 한 장을 부욱 찢었다. 생각과는 달리 큼지막하게 찢기지가 않는다. 아래로 갈수록 폭이 좁아졌다. 생각보다 작은 크기의 종이를 손에 움켜주고는 고민을 시작했다. 이걸로 칼을 감싸놓고 숨겨놓기에 충분할까, 더 큰 종이를 찾아야 할까 싶다가도 더는 시간을 낭비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 공을 들여가며 고른 칼을 종이 위로 얹어 본다. 날카롭게 뻗어 있는 칼날 끝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강렬함과 서늘함이 공존한다고 해 두자. 이어 조심스럽게 돌돌 말아가며 빈틈이 보이지 않게 칼을 숨기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종이가 모자랐고, 한 장을 더 찢어야 했다.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꽁꽁 감춰두고,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정성을 다해 나름의 포장 작업을 마쳤다. 이제 만발의 준비가 끝났다.


'할머니, 기다려. 기필코 내가 죽여 버릴게.'


저주를 끊어낼 기회가 왔다. 디데이는 오늘이어야 한다. 할머니가 퇴원했다는 걸 알면 또 언제고 찾아올 테니. 쓰레기보다 못한 그로 인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는 다쳐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때처럼... 그냥 떠나보내는 일도 없어야 한다. 하늘이 이런 나를 돕지 않았기에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신들이 책임을 다하지 않았으니, 그들의 책임이 나에게 전가된 거라고 말이다. 앞으로 벌어질 행동에 타당하면서도 합리적인 이유를 대며 스스로에게 위안을 심어줘야 했다.




그를 만나기 위한 시나리오를 짜야했다. 존속 폭행으로 경찰이 자신을 쫓고 있는 걸 알고 있을 테니, 쉽게 집으로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할머니가 알뜰살뜰하게 모은 돈을 미끼로 투척해 본다면 그를 유혹할 수 있지 않을까, 나를 찾아오려고 어떻게든 노력하지 않을까. 어딘지 모를 도박장을 밥먹듯 드나들었고, 빈 주머니를 탈탈 털어가며 술을 사러 매일같이 편의점을 들락거리던 그였다. 그는 언제나 돈이 필요했다. 할머니를 다치게 고 아프게 했던 이유는 언제나 '돈'이었기에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았다. 할머니의 통장을 핑계로 그에게 연락을 취해야 했다. 휴대폰을 어디에 뒀더라.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점점 커져가는 소리가 대문 밖에까지 들릴까 무서웠다.


철컹.


휴대폰을 찾던 손과 발이 멈춰버렸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것 마냥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내 심장 소리가 정말 집 앞 골목에까지 들리기라도 했던 걸까. 그래서 누군가 확인하러 들어오려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그가 온 걸까. 막을 깨는 소리와 함께 찾아왔을지도 모를 그를 난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


"하동빈 군. 혹시 집에 있어요?"


아빠가 아니라는 사실에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이 보이지 않게 조금 더 꾹 누르며 현관문은 열었다.


"경찰입니다. 교통과에서 나왔습니다. 동빈 군 맞아요? 하기수 씨 아들 되시죠? 혹시 집에 있습니까?"


경찰에 잡히기라도 한 걸까. 그가 나와 부모 자식 관계가 맞는지를 물어왔다. 평소에도 대답을 피하고 싶던 질문이었기에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쉼 없이 질문을 쏟아내던 경찰은 다급하게 말을 이어 나갔고, 내 두 귀를 의심해야 했다.


"하기수 씨, 현재 도주 중입니다. 뺑소니 사고를 냈고 현장에서 도망쳤습니다. 하기수 씨와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죠? 수사에 협조 부탁합니다."




* 사진 출처 : Pixabay, tev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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