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입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나를 놀라게할 목적으로 생전 처음보는 저 아이가 복화술을 하고 있거나, 혹은 마음 속으로 했던 말이 정말로 내 고막을 두드렸거나. 내 앞에 있던 잠자리가 말을 했다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그 음성이 제법 또렷하게 내 귀에 꽂혀버렸다. 오랫동안 단련된 맷집으로 왠만한 충격이나 소리에 쉽게 놀라는 법이 없던 내가 뒤로 나자빠져야 했으니 이건 그냥 넘길 수 있는 작은 일은 아니었다. 혹시 이 동네에서만 가질 수 있는 초능력이 나에게도 들어온 것일까. 그렇다면 저 여자아이도 내 마음이 들릴까?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혹시 너도 들려?"
그냥 가려는 그 애를 돌려세우고서 다시 물었다.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한 번 더 확인해야 했다. 그 아이 얼굴엔 당황스러운 기색이 잠시 비췄지만 금세 평온을 찾았다. 그녀는 얼굴을 내 앞 가까이에 대고 두 눈을 한참동안 응시했다.
'너도 나처럼 많이 아프구나. 자꾸 헛소리가 들리는 거 보면. 어쩌겠니, 그냥 사는거지 뭐.'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저 멀리 그 애가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더한 얘기를 꺼냈다가는 미친놈이라며 타박을 받고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라도 그랬겠다 싶었다. 가끔가다 새가 우는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니. 생전 처음 본 아이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잔뜩 흥분해서는 들리냐고 묻는다면 나 또한 뒷걸음을 치다 왔던 방향으로 다시 뛰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그 애는 나를 안쓰럽게 생각했으니, 다행인건가 싶었다. 이상한 일이 나에게 벌어졌다는 건 확실했지만 호기심 해소를 목적으로 더 나아가 건 옳지 않다고 느꼈다. 분명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아이일테니 다음에 다시 확인하는게 맞겠다 싶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몇 시간 후 다시 할머니와 재회했음에도 아무런 음성도 들려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입 밖으로 꺼낸 말 이외에는 말이다.
"올해는 우리 반에 특별한 일이 계속 생기는구나. 벌써 두 번째 전학생이다. 이름은 하동빈. 멀리에서 와 아직 이곳이 많이 어색할거야. 동빈이에게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가 주면 좋겠구나."
빈 자리로 가서 앉으라는 말을 끝으로 담임 선생님은 내 소개를 마쳤다.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선생님의 말은 부담스럽지 않아 좋았다. 빈 자리를 찾아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내 자리를 찾았고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제처럼 누군가의 마음이 들릴까봐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괜한 걱정을 사서 한다는 어른들이 말이 떠올랐다.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한 바가지 담아놓느라 잠도 설쳐야 했다. 바보같았던 내 자신을 탓하며 책상에 앉아 가방을 걸고 주변을 다시 쭉 살피는데, 그 애랑 눈이 마주쳤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나 보네. 지금은 또 멀쩡해 보이는 거 보면.'
맙소사.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이 안되는 일이 실제로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눈을 마주하자 그 애의 마음이 더욱 크고 분명하게들려왔다. 여전히 난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 애가 몸을 돌려 앞에 있는 선생님을 응시하자 더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대체 왜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긴건지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전학 온 첫 날부터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 학교는 내가 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선택지였고, 야구부라는 매력적인 옵션이 달려 있기에 더는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교실에는 야구복을 입고 있는 남자아이 세 명이 있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아이가 원석이라고 했고,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을 가진 나머지 둘은 한준, 두준이라고 했다. 똑 닮은 구석이 있을 뿐 아니라 이름이 비슷한 걸 보니 둘은 쌍둥이인듯 보였다. 쉬는 시간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곤두세웠다. 야구부를 본 건 처음이라 그들은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궁금했던 이유였다. 일반 학생들과 별다른 차이는 없어보였다. 교실에 있는 그들도 다른 학생들과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점심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야구부 중 제일 키가 큰 친구가 내 책상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하동빈, 반갑다. 난 최원석.우리 야구부에 관심 있다고 들었는데, 밥 먹고 코치님한테 가 볼래?"
"아, 안녕. 반가워. 그래도 될까."
"그럼! 내가 야구부 주장이거든. 딱 보면 알지. 너 체격이 좋아서 안 한다고 해도 내가 널 어떻게든 꼬셨을 거다."
"그런가. 암튼 고맙다."
운동만 하는 아이들이라 험상궂거나 무뚝뚝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렇지만은 않았다. 거친 표현 속에서도 상냥함이 느껴졌고, 굵직한 목소리에는 따스함이 베어 있었다. 방법은 잘 모르지만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고자 하는 노력이 느껴져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는 동안 마음 속에서 뭔가가 끓어 오르는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동안 끈끈하게 맺어온 관계 덕인지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깊어 보였다. 눈빛만으로도 각자의 마음을 읽는 듯 했고, 호흡만으로도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어 주었다. 책에서만 보던 지란지교(芝蘭之交)가 바로 그들을 보며 떠올린 말이 아닐까라는 착각마져 들었다. 감추고만 싶었던 가정사가 만천하에 드러나는게 싫어 친구마저 사귈 수 없었던 지난날이 떠올라 가슴을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과거로만 묻어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인데다 나도 살아가야 했기에 내 인생에도 조금은 향기를 흩뿌리는 것을 하늘의 신들 또한 허락하지 않을까. 나도 야구부의 일원이 되어 그들 사이에서 향기 나는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