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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육토피아 19화

사랑의 역행

내리사랑 후에 오는 치사랑

by 안개별


"내가 더 사랑해."

"아니야, 엄마. 내가 더 사랑해."

"무슨 소리. 엄마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절대로 알지 못할걸."

"내 사랑이 훨씬 커. 내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아?"


사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크기가 어찌나 방대하고 대단한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사랑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기에 당시의 논쟁은 사실 무의미했다. 암만 갑론을박을 벌여 봤자 승자와 패자를 가를 수는 없었다. 그 누구도 이기지 못했고, 그 누구도 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린 서로 자신의 사랑이 더 크고 위대하다고 믿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옛말을 기억한다.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했다. 나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 나를 이 세상에 내놓았으니 사랑을 주는 게 당연하다고. 그저 난 잘 받기만 하면 된다고. 그게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나도 부모가 되어 있었다. 10개월간 뱃속에 품고 있었을 뿐인데 모성애가 절로 생겨났다. 뱃속에서 꼬물꼬물 살아 숨 쉬고 있을 아이를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잠은 잘 자는지, 잘 먹고 있는지, 기분은 어떤지 늘 궁금했다. 때론 말을 걸기도 했고,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고, 함께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며 울고 웃기도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빨리 만나고 싶다가도 잘 해내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다. 임신 기간 내내 양가적 감정이 무던히도 소용돌이쳤다.


40개월을 꽉 채우고서야 첫째를 만났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소신대로 내리사랑을 실천했다. 사랑은 흐르는 물과도 같았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 흘렀다. 투입한 사랑의 크기만큼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기에 아낌없이 양껏 들이부었다. 사랑을 받은 만큼 나눌 줄 아는 그런 아이로 자랄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로 그랬다. 주변을 살필 줄 알았고,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았다. 더 바랄 게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했으니.



어느 날부터 하원하는 아이의 손은 무언가를 그러쥐고 있었다. 그녀의 작고 아담한 주먹에선 손에 쥔 것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강인한 신념이 느껴졌다. 유치원 버스에서 내린 아이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활짝 펴 보였다. 낱개로 포장된 비타민 봉지엔 뽀로로가 그려져 있었다. 소아과 진료를 마치고 선물처럼 받던, 문화센터 수업이 끝나면 상으로 주어지던 뽀로로 비타민 하나.


"비타민이네. 선생님이 주셨어?"

"응. 엄마 주려고."

"먹지 않고 왜 가져왔어. 선생님이 두 개 주셨어?"

"아니, 한 개. 먹고 싶은데 참았어. 엄마 피곤하다고 했잖아."


이제 막 유치원에 입학한 5살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실은 고마움보다 걱정이 앞섰다. 친구들이 아작아작 소리 내며 깨 먹을 때, 달큰한 냄새가 코 끝을 치를 때 그게 또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매번 엄마 주겠다며 호주머니에 넣어 올 것을 생각하니 그랬다. 그럼에도 엄마를 아끼며 생각하는 그 마음이 참으로 예쁘고 감사해 격하게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수십 번 타일러도 소용없었다. 가방 앞 주머니에 비타민이 가득 쌓이고서야 더는 집으로 가지고 오지 않을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한참을 지나 깨달았다. 그녀에겐 그랬다. 그게 엄마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매일 시간과 체력에 치어 그녀가 보내오는 시그널을 매 순간 알아채진 못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랬다. 사랑하는 마음을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솔직하게 표현했고 투명하게 내비쳤다. 그렇다. 나는 아이를 통해 치사랑을 끊임없이 경험하고 있었다.


수십, 수백 번 혹은 수천 번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경험한 치사랑을 횟수로 따진다면 말이다. 아이들이 전한 그 마음 덕에 매일을 살아낼 수 있었다. 무한한 기쁨과 최대한의 행복을 맛보며 살아있음에 감사할 줄 아는 삶을.



넘치는 내리사랑을 실천한 후에야
찾아오는 치사랑은
분명한 사랑의 역행이다.


당연하게도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중력을 거스르는 대단한 힘을 가진 것이 바로 치사랑이 아닐까. 거기서 오는 강력한 에너지가 후회없는 어제를 그려냈고, 희망찬 오늘을 그려갈 것이라 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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