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가꾸는 일
"엄마, 작년처럼 친구들이 듣는 둥 마는 둥 그러면 어떡해?"
"네 재능을 꼭 남들이 알아줘야만 해?"
"그건 아니지만... 야유를 받으면 속상할 것 같아."
"2학년은 형님 반이니까 그렇지는 않을 거야. 야유가 들리면 그건 질투를 느껴서라고 해 두자."
"그래도 싫어. 하고 싶지 않아. 분명 지루하다고 할 거야."
학급 발표회를 앞둔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1년에 한 번 있는 그날이 되면 반 아이들 모두 정해진 순서대로 앞으로 나와 준비해 온 장기를 마음껏 뽐낸다. 작년에는 노래를 부르던 친구도 있었고, 태권도 품세를 하거나 줄넘기 2단 뛰기를 했던 친구도 있었다. 올해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첫째에게 동화를 쓰고 낭독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동시보다는 동화가 듣기에 편할 것 같았다. 작년엔 동시를 써서 읽었는데 분위기가 싸했다고 했다. 단 한 명, 담임 선생님만 빼고. 시 낭송 후 울컥했는지 선생님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고 했다.
"학급 발표회를 하는 목적에 대해 혹시 들은 적 있어? 이걸 왜 하는 건지."
"음... 잘하는 걸 친구들 앞에서 자랑하라고?"
"오~ 제법인데! 정확해. 갈고닦은 실력을 뽐내라고 하는 거야. 그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거지. 스스로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재능을 키워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야."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으로 멀뚱히 나를 바라보는 첫째를 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네가 잘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렴. 엄만 네가 가진 가장 큰 재능이 '상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걸 글로 표현하는 재주가 있지. 분명 의미 있는 기회가 될 거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네 꿈을 펼쳐볼 첫 번째 기회."
오랜 대화 끝에 첫째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친구들의 피드백만을 걱정하기엔 그녀의 꿈이 너무도 확고했다. 작가가 되겠다는 부동의 신념이 실체 없는 두려움을 이겨 버렸다. 며칠간은 선정한 몇 가지의 글감을 들고 와 구상한 스토리라인을 재잘재잘 떠들어 댔다. 이건 어떤지, 저건 어떤지 고민에 고민을 더했다. 판타지 요소가 가미된 덕에 모두 흥미롭게 들렸다. 조언보다는 칭찬으로, 권유보다는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작품 활동을 펼쳐갈 수 있도록 두었다. 즐거움으로 시작된 창작은 때론 고통을 수반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작가들만 겪는다는 그 창작의 고통을 네가 느끼고 있다니, 엄만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라며 자존감과 자긍심을 심어주고자 격려의 말을 보탰다. 3주간의 긴 고뇌 끝에 그녀의 열정이 담긴 첫 단편 동화가 탄생했다.
장기자랑 당일, 첫째는 생각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이미 글은 다 써 놨고, 낭독 연습도 수차례 끝냈으니 딱히 걱정이 없다고 했다. 수심에 차 있던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교 후에도 지금의 모습으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집으로 돌아온 아이의 표정은 상당히도 밝았다. 마치 내 앞에 환한 빛을 내뿜는 태양이라도 둥실 떠 있는 것 같았다.
"작가가 되기 위한 첫 도약이네. 무사히 마치고 온 걸 축하해!"
"엄마, 친구들이 너무 재미있다고 칭찬했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며 내년에도 같은 반 하고 싶다는 친구들도 있었어."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작고 앙증맞은 한 마리의 참새 같았다. 기쁨으로 가득 찬 아이의 목소리가 듣기에 참 좋았다. 파도처럼 쉬이 부서지던 마음이 일순 평온해졌다.
"그리고 더 대박은 뭔지 알아? 만화책조차 보지 않던 남자애들이 쉬는 시간에 다가와서는 내 책을 빌려 달라는 거야. 서로 보겠다는 바람에 순서를 정해줘야 했다니까."
"책을 싫어하는 친구들도 네 동화를 보겠다며 왔다고? 정말 대박 맞네!"
사늘하던 집 안 공기가 따숩게 변해 갔다. 어느새 온 집안에 훈기가 돌았다. 앞에 놓인 사과가 누렇게 변하고 바싹 메말라 가는지도 모른 채 우린 서로를 마주 보며 한참을 깔깔거리고 웃었다. 찔끔 눈물이 날 정도로 배를 그러안고 웃고 또 웃었다.
어쩌면 타인의 시선을 지나칠 정도로 신경 쓰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행동의 결과를 지레짐작하며 하지 말아야 할 이유와 명분을 쉴 새 없이 만들어 왔을지도. 자신의 마음은 뒷전으로 둔 채 보이는 것만을 중시하며 연기를 해야 했던 지난날의 시간들이 덩어리째 떠올랐다. 그때의 소녀는 미숙했고 온전치 못했다. 그런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첫째는 스스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고, 꿈을 향해 달려가겠다는 집념 또한 강했다. 그런 이유에서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단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아티스트가 되어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겠다고 했다. 건강하게 잘 키워 온 자존감 덕분일 터였다.
자존감(自尊感)
: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
꿈을 키워가는 일에 많은 것들이 투입되어야 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실현시키겠다는 강인한 의지, 그리고 건강한 자존감이 아닐까. 일단 위 두 가지가 갖춰진다면 부차적인 것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될 것이라 믿는다. 품위를 지키며 스스로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더 많이 나를 아껴줘야지. 더 자주 나를 사랑하고 품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