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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더하기 Oct 25. 2022

엉덩이에 단풍 든 날


계획은 완벽했다. 눈에 빨강 노랑 셀로판지를 대고 보는 것 같이 화려한 세상이다. 이 멋진 가을날 사무실에서만 보내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며 친구와 휴가를 내서 단풍구경을 가기로 했다. 집에서는 너무 멀지 않은 그렇다고 너무 가까워 여행 기분이 나지 않는 곳은 제외했다.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완벽한 곳은 어디일까를 고민을 하다가 내장산으로 정했다. 1부는 가벼운 산행을 하고 2부는 장어구이를 먹고 백운사 쪽으로 드라이브를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 만나 내장산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단풍만큼 화려한 등산복을 입고 가을을 즐기러 와 있었다. 우리는 등산화 끈을 적당한 길이로 조절을 하고 더듬이 같이 가방에 꽂고 왔던 등산 스틱을 꺼내 키에 맞췄다. 


등산안내 표지판에서 계획을 다시 되짚었다.

“원적암까지만 오르자, 우리에겐 2부가 있잖아.” 

등산은 왕복 2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파란색 색종이 같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한껏 물든 단풍나무는 잘 정리된 등산로를 사이에 두고 포토존을 맘껏 제공해주었다. 단풍처럼 화사한 얼굴과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원적암까지 올랐다. 


“소시지랑 귤이나 먹고 내려가자.” 

장거구이를 먹을 생각으로 간식도 최대한 간단하게 준비하자고 했었다. 나무젓가락 길이만 한 소시지 2개 계란만 한 귤 2개 엄지손가락만 한 초코바 2개 그리고 물 이 전부였다. 둘은 적당히 널찍한 자리에 앉아 소시지를 하나씩 먹으면서 내장산 단풍에 감탄을 했다. 햇빛에 비쳐 바람에 흔들리는 단풍은 보석 루비와 호박 보다도 예쁜 색으로 우리를 유혹했다. 소시지를 먹고 시원한 귤 즙으로 목도 축이고 계획대로 일어나서 내려가려다가 단풍을 더 구경하고 싶어졌다. 


“조금 더 올라가 볼까?” 

이때까지만 해도 이 말이 최악의 상황을 만들지 우리 둘은 상상도 못 했다. 조금 더 올라 불출봉에서 능선을 따라 한 30분쯤 걷다가 다음 하산길이 나오면 내려가자고 했다. 그런데 1시간 30분을 넘게 걸어도 하산 길은 나오기 않았다. 능선을 지날 때마다 현위치를 알리는 표지판이 하나씩 나오는 게 아닌가! 망해봉, 연지봉. 우리는 마치 산악인처럼 능선을 따라 산봉우리를 하나씩 정복하고 있었다. 하산길이 안 보이는 것처럼 등산객 역시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등산로 표지판에는 연지봉을 지나 까치봉까지 가야 급경사 내리막 하산길이 있었다.

원적암에서 왜 표지판을 안 보고 출발했는지 후회를 하기에는 늦어버렸다
. 점심시간이 훌쩍 넘긴 시간에 남아 있는 건 초코바 2개와 물이 전부였다. 갈증이 나도 물은 마음 놓고 마실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은 안보였지만 그래도 혹시 소변이라도 마려우면 난감한 일이 벌어질 거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초코바 하나씩을 나눠 먹고 물은 갈증을 달랠 정도로만 마시면서 불쌍한 몸을 마지막 정복지 까치봉을 향해 움직였다. 평소 운동을 안 하던 나는 지칠 대로 지쳤고 그나마 배드민턴으로 평소 체력이 단련된 친구는 나를 기다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더 이상 단풍의 고운 빛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시야는 친구의 등산화만 따라갔다.

까치봉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을 향하고 있었다.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심한 계단이 계속 이어졌다. 힘이 빠진 다리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개다리춤을 추었다. 열 계단 내려가서 3분 쉬고 열 계단 내려가서 3분 쉬 고를 반복하는데 저 멀리서 올라오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이게 몇 시간 만에 보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무인도에서 구조대를 만난 듯 반가워 우리 둘은 손을 흔들려하는데... 


“비켜 주세요. 비켜 주세요."

앞서 오는 사람이 우리를 보고 큰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산악구조 대원이라고 써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 급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발목에 붕대를 감은 건장한 중년을 지게에 지었다. 그때 헬리콥터 소리가 요란하게 하늘에 울려 퍼졌다. 산이라는 특성상 두 사람이 들것으로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사람이 지게로 지어서 옮기는 것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하산을 하던 남자가 발목을 접질리면서 복숭아뼈에 금이 가서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고 구급 헬리콥터가 착륙할 수 있는 까치봉까지 올라간 거란다. 이런 광경은 뉴스로만 접했지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우리는 ‘조심해서 가자’를 주문을 외우듯이 말했고 계단을 한 칸 한 칸 온 정신을 집중하면서 내려갔다. 하지만 아래 계단에 스틱을 먼저 찍고 발을 디디는 순간 이미 풀려버린 나의 다리는 지탱하지 못했고 그대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스틱은 부러진 더듬이가 되어 어깨 위로 만세를 불렀고 다리는 뼈대 없는 봉제인형처럼 제멋대로 계단에 걸쳐졌다. 이때 꼬리뼈가 계단 모서리에 정확하게 찍혔는데 이렇게 이어진 상황이 너무 기가 막히고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 꼬리뼈는 발을 디딜 때마다 전기가 통하듯 아픔이 전해졌다. 기저귀를 찬 아이가 걷는 모습으로 엉덩이를 쭉 빼고 스틱에 의지 하면서 걸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초저녁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하산에 성공했다. 배가 너무 고팠던 우리는 주차장 앞 포장마차에서 파는 풀빵을 사서 먹으며 서로를 보고 어이없음과 안도의 마음이 합쳐져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우리의 2부는 풀빵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파란색 색종이 같았던 하늘이 까맣게 변했을 때 집에 돌아왔다. 


계단에서 미끄러진 엉덩이는 과욕이 부른 6시간의  산행을 상기시켜 주 듯 내장산 단풍만큼이나 검붉게 멍이 들었다. 꼬리뼈의 통증으로 한동안 반듯하게 누워서 자질 못했다. 산행은 욕심 없이 계획된 코스로만 다니기로 굳게 다짐을 하고, 제 살빛을 찾아가는 엉덩이는 산에 갈 생각에 가볍게 씰룩거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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