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비운다는 것은 나의 일부를 떼어내는 것 같았다.
그때는 미니멀이라는 유행도 없을 때였다. 있는지조차 몰랐을 때였다.
'죽음'이 충격이지 않았다.
그 이후의 사람들의 모습이 충격이었다.
정작 슬픈 사람은 담담하고 아무도 없을 때 가슴을 틀어쥐며 소리없이 꾸역꾸역 울어댄다.
왠수같던 인간들은 오지랖을 떨며 요란스럽게 통곡한다.
장례가 치뤄지고 난 이후엔 돈계산에 바쁘다.
상주가 돈이 없으면 자기들에게 엄한 것이 붙을까 두려워 끝내 욕나부랭이까지 하며 간다.
내 앞에서 싸우는 그들은 추악했다.
돈 달라고 한 적 없는데...부조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왜요?
난 당신이 목욕탕에서 화투하고 놀 때 당신 아이들 보모까지 했는데.
왜요? 왜 싸워요.
그런 모습을 수차례 보고 컸다.
그리고 또 그런 상황을 만나다니...
옆지기에게 물었다.
"혹시 당신 나 죽으면 내 물건 다음날 다 버릴껀가?"
"당연하지. 뭣하러 가지고 있어."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를 그 말은 충격이었다.
"그랬구나.그런데 왜 이 사람은 나하고 살까. 왜 이혼은 안된다고 할까."
그날 내 마음 속엔 그동안의 모든 선택들에 대한 후회와 함께 되돌릴 수 없다는 절망감에 잠식당했다.
그래서 시작한 첫 비움이 '책' 이었다.
1000권의 책들은 그렇게 비워졌다.
어느날 뉴스토픽에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책 속에서,
자녀가 미래의 자신에게 남긴 아버지의 편지를 보며 기뻐하고 그리워하는 장면이 보도됐었다.
그땐 그 순간의 감동만을 상상했었다.
책이 귀했던 시대를 살았던 나였기에,
책 하나하나에 돈을 넣어 놓기도 하고 남겨질 미래의 자녀에게, 남편에게 편지를 써서 모아놓았다.
그런데 그날, 그런 행위들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어쩌지. 이 책들은 나에게 옷 따위와는 비교되지 않게 귀한 것들인데. 구하기 어려운 것도 많고'
마침 당시 알라딘이 생겼다. 그리고 개인간 책 중고거래가 활성화됐다. 그 시작에 들어갔다.
"좋은 책, 귀한 책 고맙습니다"라는 답장을 받으면,
귀한 곳에 시집장가 잘 보냈구나!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덕분에 편안하게 비움을 할 수가 있었다.
여전히 옆지기의 말은 상처로 남고 책은 싫어요라는 아이의 말에 섭섭은 했지만...
누군가에게 가서 새롭게 다시 새 생명을 얻어갈 책들을 떠올리면 상처도 아쉬움도...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겠지'라며 이해는 되지 않지만
피 철철 나던 상처에 단단한 딱지가 붙으며 아물게 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책들이 정리됐을 때,
책에 대한 평생의 허기짐과 미련은 사라지고
도서관의 모든 책들이, 새로운 신간들이
가슴 속에 피어났다.
그렇게 온전히 다 비워낼 수 있었다.
(그림 : 챗GPT 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