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집사 될 자격이 없어서
식집사 : 식물을 반려동물처럼 애정하며 잘 키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때 그런 용어도 없을 때 식물을 그렇게나 열심히 키웠다.
화목한 가정엔 왠지 있어야 될 것 같은...
그래서 반지하를 탈출하자마자 전세로 살던 주차장 마당 한켠에 주인집의 허락을 받아 참으로 다양한 식물을 키웠다.
씨앗부터 물을 줘가며 키운 녀석도 제법 많았다.
아이에게 씨앗의 성장과정을 보여주고 가르치는 게 행복했었다.
떡잎부터 시작하는 식물의 아름다움은 아이가 성장하는 소리와 함께였기에 더욱 더 아름다웠다.
서향이지만 베란다 있는 이 집에 왔을 땐
드디어 호박과 오이까지 키웠다. 그러면서 잠시 꽃집을 해보면 어떨까? 꽃이 이렇게나 좋은데...
그러나 어느 여름.
모든 꽃들이 말라 죽었다. 말라 죽어가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소리없는 아우성을 쳤을 그들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이 모든 것이 팍팍했기에...
어느날 바스락거리며 가루가 되어버린 그들을 보고 알았다.
책은 비웠지만 식물은 비우지 않았을 때였다.
헉헉거리면서도 용케 버텨내며 지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그들이 가루가 되어 날라다닐 때,
내 안의 성들도 이미 가루가 되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격이 없어...
그 무엇도 사랑하고 보살필 자격.
이미 내 숙제 하나도 버거워 매일 나 자신마저 부숴버리자고 컥 컥 울음을 토해내는데...
"망할놈의 세상. 다 지옥에나 가버려!"
"다 죽었으면 좋겠어..."
그런 나의 응답에 식물들이 죽었다.
미안함과 설움, 후회, 자책이 나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였다.
그 어떤 것도 한번 오면 쉽게 버리지 못하고
떠나면 눈물로 기어코 나를 집어삼키는...
생명이었기에 물건보다 그 존귀함과 소중함이 남달랐고 그 여파는 지나칠 정도의 감정소모를 가져왔다.
결국 그 와중에 죽지 않은 몇 개의 식물은 다시 잘 키워서 당근나눔을 했다. 책처럼 시집장가를 보냈다.
그제야 삶에 숨통이 틔였다.
죄책감과 지나친 감정에서 해방되기!
이 모든 이유로 식물도 동물도,
하물며 작은 물건조차 쉽게 내 구역에 들이지 않는다.
법정스님의 말처럼
고작 난 하나 키울 뿐인데...
내가 짊어져야 될 무게는 몇 배가 된다.
사람에 따라 전혀 그렇지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란 사람은 그렇다.
모든 것이 삶의 무게로 왔다.
그렇게 식물을 비웠다.
안녕. 사랑했던 한 때 그 텃밭들.
<사진:옛날 우리집 어느 한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