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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밥이 별미라고?

by 이종열

은행에 다니고 있었을 때 나는 요일의 개념이 명확하였다.


죽기만큼 싫었던 날은 분명 월요일이었다.


짓궂은 아들놈이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아빠.

무서운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내일이 월요일이랍니다. 하하하-


말하고 그 실실의 웃음기를 그대로 입가에 머물고 있는 아들놈이 귀엽기도 하였지만 그때는 살짝 얄밉기도 하였다.


지점 팀장 회의가 있던 날

팀장들은 이 날 각자의 맡은 직무에 대한 현재의 실적과 향후에 대한 예측, 문제점 등을 서로에게 보고하였다.

이날이 화요일이었다


수요일은 가정의 날이라 일찍 퇴근(아무리 늦어도 오후 6시)하였고 목요일은 연수의 날이었다.


그래도 비교적 마음이 가벼운 날이 있었다.

그날이 금요일, 주말이었다.


그때 내가 그렇게 싫었던 월요일이 백수가 된 지금은 가장 좋다.

내가 죽기만큼 싫었던 월요일 출근을 아직 job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켜놓고 나만 뒷짐 지고 바라보는 어쩌면 얄미운 나만의 통쾌함이 월요일에 있다.


오늘이 그 월요일이다.

마음 저쪽 한편에 야릇한 행복감이 있는 데다가 그때 나만큼 월요일이 싫었을 옛 전우들(퇴직한 직장동료)과의 모임이 있는 날이 오늘이다.


한 달에 한번 하는 이들과의 만남이 이제는 기다려진다.

이들도 그렇다고 내게 말했다.


퇴직 전에는 출근해서 거의 매일을 은행에서 봐야만 했던 이들과의 만남이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이들도 그때는 그랬노라 내게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직장 상하(上下)의 관계도, 출근해서 함께 오늘의 목표를 이루어야 할 전우의 관계도 아닌 가슴에 달고 있었던 휘장을 떼고, 계급장 떼고 그저 누구의 아빠, 누구의 엄마로 만나는 이들과 만나는 지금은 편하다.

만남 자체가 좋다.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한다.

말이 통하니 마음이 통한다.

그때 은행에 관한 일들을 이야기할 때면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고 말귀를 금방 금방 알아듣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들과 하루를 보낸다.

누군가 그랬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남. 녀가 없고 모두가 동성이다.-라고ㆍㆍ


맞는 말 같다.


얼마 전 은행에서 각자 계급의 자리에 있었을 때는 서로가 말을 아끼고 삼갔다.

업무 외적인 말은 가급적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 멤버들이 모이면 나의 수다도 이들 누구 못지않다.


아주 먼 옛날 우리가 신입이었을 때 우리가 모셨던 무서웠던 상사와 성향이 특이하셨던 어느 고객분을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물 만난 물고기였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다큐멘터리 출연자가 된다.


이 모임에서 나만 mr이고 둘은 mrs다.


어느덧 점심 먹을 시간이다.

정말 셋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오늘 우리 점심 뭐 먹을까?-

내가 물었다.


-우리 오늘은 카페에서 브런치 어때요?

나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브런치 한번 하고 싶은데 우리 남편은 영 무드가 없어서 카페는 질색팔색 하니까 그럴 일이 없었네요.-

김여사가 말했다.


-언니

브런치는 나중에 애인 생기면 둘이 가고 오늘은 우리 별미를 한번 먹어봐요.-

권여사가 말에 장난기를 섞어 연이어 말했다.


권여사는 김여사보다 한 살 아래지만 은행에 입행은 같은 해에 하였다.


나와 김여사의 시선이 권여사 입을 향했다.


-우리 오랜만에 별미로 깜둥보리밥을 한 번 먹어봐요.

저는 쌀 한 톨 섞이지 않은 보리밥을 먹을 때면 옛날 생각도 나고 그게 또 내 입맛에는 딱이더라구요.-

나와 김여사의 시선을 모은 권여사가 말했다.


-그래요 그럼

우리 오늘은 별미로 보리밥 먹으러 가요.

괜찮죠?-

말하고 김여사가 나를 쳐다본다.


김여사는 배려심과 이타심이 많아 자신의 생각과 타인의 생각이 다르면 이내 자신의 생각을 접었다.

늘 그랬다.


생각해 보면 나 또한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지만 이기심보다 이타심이 더 큰 것 같다.


단체에서 무엇을 정할 때 나는 거의 내 목소리를 내지 않고 누군가가 내는 아이디어를 따른다.

어떤 때 오늘 단체로 소주를 마시자라고 결정하여도 완전 비주류인 나지만 나는 스스럼없이 단체 결정에 따르고 소주집에서 콜라를 주문하였다.


그런데 방금 권여사의 보리밥 제안은 내가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나는 보리밥 먹기를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쳐다보고 냄새 맡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

보리밥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보리밥에 대하여는 안티 중에 안티다.


내 기억으로는 내가 어렸을 적~

정확히 말하면 내가 내 인생을 최초로 기억하는 그때쯤부터 나와 가족들의 주식(主食) 보리밥이었다.

그것도 아주 새까만ㆍㆍ


이유식 이후의 내 최초 음식이 보리밥이었으니 내 몸은 이 보리밥만이 나의 생명줄이라 여기면서 적응하였으리라.


이 세상 어디에도 보리밥 이외의 음식은 없고 세상사람 모두가 이 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살아갈 것이야.

꼭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내 잠재의식 밑바닥은 이렇게 결론을 내고 있었을 터이다.


대안이 없는 현실은 차라리 편할지 모른다.

그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밖에 다른 대안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보리밥을 먹으면서 나의 유년기를 보냈고 1970년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때까지 우리 집 밥상 위에는 늘 깜둥보리밥에 생된장, 말라비틀어진 고추와 오이가 어제, 그제 같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여름 어느 날

할배께서 낚싯대로 물고기라도 몇 마리 잡아오신 날은 그나마 특식으로 민물고기 매운탕을 먹을 수 있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쯤 입학하고 처음으로 도시락을 싸서 등교한 적이 있었다.


4교시 수업을 마치신 선생님은 교무실로 가셨고

아이들은 각자 앉은 책상에서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서른 명이 넘는 班아이 누구도 용감하게(?) 책상 위에 자신들의 도시락을 꺼내 놓는 아이가 없었다.


분명 집에서 도시락들을 싸왔는데도 말이다.

아이들은 서로 옆자리 친구 눈치를 보며 책상 안에 있는 도시락을 꺼내지 못했다.


교실 안에는 무겁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때마침 교실 앞으로 지나던 선생님께서 교실로 들어와서 한 말씀을 하고 나서 아이들의 도시락 뚜껑이 열렸다.

-느그 점심시간이 한 시간인데 쫄쫄 굶고 오후 수업할라카나?

퍼뜩 도시락 안묵나?-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아이들의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리기는 하였지만 아이들은 하나같이 도시락 뚜껑으로 각자의 도시락을 감추고 밥을 먹었다.

밥 한술을 뜨고 뚜껑을 닫았고 반찬 한 입을 먹고 또 뚜껑을 닫았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도시락 뚜껑을 용감하게 열지 못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자신들이 싸 온 도시락 안의 밥이 깜둥 보리밥이었고 반찬이 고추와 생된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 전부가 똑같은 이유로 똑같은 행동을 하였다.


보리밥은 이내 배가 꺼졌다.

수업을 마치고 학교를 파할 때쯤이면 또 배가 고팠다.

한창 자랄 나이였고 조금 전 먹은 도시락의 내용이 영양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집으로 온 나는 만사를 제치고 부엌에 들어갔다.


집에는 어른들이 한 분도 계시지 않았다.

한참 농번기에 농군이 집에 있대서야 말이 되었겠는가?


부엌으로 들어간 나는 이내 부엌 안 찬장문을 열고 안을 쌑쌑이 뒤졌다.


내가 학교에 간 사이에 엄마가 새로운 먹을 것을 장만해 놓으셨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러나 내 어린 기대감은 이내 물거품이 되었다.

찬장 안은 내가 학교에 싸간 도시락의 확대판이었다.


똑같은 반찬이 양(量)만 더한 채로 찬장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골집의 부엌은 하나같이 천장이 높았다.

하나같이 석가래들이 천장을 바치고 있었고 그 석가래들은 하나같이 그을음으로 새까만 모습이었다.


또 하나같이 그 석가래 천장에 밥을 넣은 광주리가 매달려 있었다.

그 광주리들은 보자기에 싸인 채 석가래에 매달려 그네처럼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로 흔들렸다 저리로 흔들렸다.


배고픈 나는 마당에 있는 키 작은 사다리를 놓고 그 광주리를 내렸다.

덮인 보자기를 여는 순간 나는 또 설레었다.

혹시 광주리 안에 쌀밥이 들어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내 기대는 또 다른 물거품으로 광주리와 같이 흔들거렸다.

깜둥보리밥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종례시간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느그 집에 가서 천장 광주리 속 밥을 묵을 때 혹시 느그 어무이가 이자뿌고 밥뿌재(보자기)를 안 덮어 놓으셨으마 그 밥은 묵지마라.

그 밥뿌재 안의 밥은 보나 안보나 파래이(파리)들이 새까마이(새까맣게) 앉아 있을끼고 그 밥을 느그가 묵고 까딱 잘못하마 장티푸스 걸린다.

장티푸스에 걸리마 느그는 마 꼼짝없이 죽는기라.

그 파래이들의 느그집 변소에 앉았다가 금방 광주리에 앉았는데 느그 그 밥 묵을 수있나?-


하필 그 다음날 우리 집 부엌 광주리가 발가벗은 채로 부엌 석가래에 매달려 있었다.


선생님의 예언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보자기가 없는 광주리는 피리들의 전유물이었고 내가 보았을 때 광주리 안은 밥 반, 파리 반이었다.


배고픈 어린 나는 짧게 고민하였다.

... 광주리에 앉아 있는 이 파리들은 쫓아버리고 보리밥을 먹을까?

아니면 선생님이 말씀하신 장티푸스에 걸리지 않기 위해 먹지 말까?...


내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무섭다는 장티푸스보다 당장의 배고픔이 더 크고 빨리 와닿았다.


어린 나는 손으로 광주리 속 파리들을 쫓아내고 그릇에 밥을 담았다.

찬장에서 점심때 학교에서 먹었던 고추와 생된장을 다시 꺼내 먹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때 나는 한 번도 장티푸스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어릴 적은 깜둥보리밥과 함께 하였다.


내가 보리밥에서 어느 정도 졸업을 한 것은 그때 우리 국민들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정부가 도입한 통일벼가 논에 심어지고부터였다.


그 통일벼는 질(質)보다는 양(量)을 목표로 농가에 배포되었다.

그 통일벼는 정부에서 도입하고 한참 후에 우리 마을 논에 심어졌다.


그때 나는 태어나고 처음 쌀밥을 먹어 보았다.


청년기 때 내 몸은 참으로 말랐었고 허약하였다.


그런 나를 보고 어머니는 자주 말씀하셨다.

-내가 니한테 마이(많이)미안타.

한참 클 나이에 제대로 묵지 못해서 글타.

미안테이-


나는 지금도 보리밥을 먹지 않는다.

아니

먹지 못한다.


우선 보리밥은 냄새부터가 싫다.


어쩌면 내가 평생을 먹을 보리밥의 정량을 내 유년기에 다 먹었는 것 같다.


내 나이 환갑, 진갑을 다 넘긴 지금

내가 어렸을 적 시골에서의 추억들은 참으로 소중하고 값지다.

어찌 돈으로 살 수 있을까?


가끔 단 하루만이라도 그때 그 시절, 그 장소로 되돌아가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그때 먹었던 깜둥보리밥만큼은 먹기 싫다.


김여사와 권여사에게 말했다.

어렸을 적 내게 주식(主食)이었던 깜둥보리밥이 지금이라도 절대 별미가 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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