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엘프라트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이었다. 공항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이미 어둠에 묻혀, 어딘지, 무엇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심사를 하기 위해 걸어가던 중, 공항 내의 커다란 스타벅스 전광판이 보이자 조금 안도가 되었다. 먼 곳으로 왔다. 낯설고, 누구도 아는 사람 없는 곳으로, 기어이 와버린 것이다. 떠나온 곳의 온도보다 미지근한 공기 속에서 잠시 크게 숨을 쉬어 보았다.
까탈루나 광장 근처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좀 지쳐 있었지만 큰 창이 있는 하얀 방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12월 31일 오전 11시에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14시간을 거쳐 이곳으로 왔는데 이곳의 시간은 아직 12월 31일 저녁 7시였다. 비행기에서 보낸 나의 시간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비행기가 알마티를 지나 아랄해 위에 왔을 때, 스페인에 도착할 때까지 딱 절반의 시간만큼 걸렸었다. 좌석 앞 모니터 운항경로 속의 비행기는 유난히 그곳에서 오래 머무는 것 같았다. 혹시 그때였을까? 사막이 되어버린 바다, 아랄해에서 나의 시간들도 모래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공간 속으로 흐트러진 채, 나는 당분간 이곳의 시간 속에서 지내야 한다.
스페인에서는 12월 31일에서 1월 1일이 되는 순간, 우리나라처럼 제야의 종을 열두 번 울리는데, 그때 포도를 한 알씩 열두 알 먹는 풍습이 있다고 숙소 사장님이 말씀해 주셨다. 새해 열두 달의 행운을 비는 풍습을 숙소 테이블에 앉아 태블릿 모니터를 보며 나도 함께 했다. 포도를 종소리에 맞춰 한 알씩 먹는 건 생각보다 바쁜 일이었다.
새해가 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웃으며 서로의 행운을 빌었다. Happy new year! 나는 열두 알의 포도를 먹고 와인을 마시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코로나 때문에 3년간 못했던 몬주익 분수쇼가 에스파냐 광장에서 열린다고 해서 모두들 들떠 보였다.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함성과 폭죽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들이 방음이 되지 않는 유럽의 하얀 벽 안으로 고스란히 스며들어왔다. 새벽이 깊어가도 소리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새해가 되는 것이 기쁜 일인 것이다. 밤을 새울만큼, 폭죽을 터뜨릴 만큼, 흥겨운 일인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비행기에서 경계를 알 수 없는 새해를 맞이했을 나는, 다시 맞는 새해의 시간 속에서 쉽게 잠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