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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걸음씩 Dec 09. 2024

차별

[치사해도 참아야하는 것이 직장]

내가 대표와 처음부터 관계가 안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실력도 있는 사람이었고, (당시 생각하기에) 따뜻하기도 했다. 

입사 초기에 나이 어린 사수에게 일을 배우며 당한 서러움때문에 울면서 혼자 야근을 한 적이 있었는데 대표는 사수를 함께 씹으며 위로 해 주었다.

그때 나는 대표가 인간적이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대표는 월급이나 상여금에 대한 약속도 정확하게 지켰다.

이런 당연한 일들이 고맙게 여겨진 것은 예전 직장 대표의 불성실함 덕분(?)이기도 하다.

예전직장에서는 월급날 대표가 급여 이체 예약도 안 하고 해외여행을 가는 바람에 뒤늦게 받기도 했었다.

상여금은 자기 내키는대로 주었다 말았다 하면서 오너의 고유권한이라고 말했었다.

그런 사람과 비교 하니 비교가 안될 정도로 지금의 대표는 신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사 후 3년 정도 지났을 무렵,  이유는 모르겠으나 대표는 갱년기 여성처럼 매우 예민해져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별것도 아닌 일에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조금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변덕을 부렸다.

그럴 때면 우리는


"오늘도 사모님 하고 싸웠나 보네. 사모님이 잘해야 우리가 편한데 말이야"


라며 수군거리며 웃어넘기곤 했다.

대표의 개인적인 기분 때문에 우리의 하루 컨디션이 좌지우지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일부러 희화화했다.


대표는 우리 셋 중 나영을 특별히 신뢰하고 예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영은 대표에 대해서는 입안의 혀처럼 굴었다.

무리가 되는 권유도 대표가 하라는 일에 나영의 대답은 항상 '예스'였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냅킨은 물론 이쑤시개까지 챙겨주는 등 그의 필요를 미리 알고 준비했다.

신을 벗고 들어가는 식당에서는 대표가 나오기 전 미리 나와서 그의 구두를 가지런히 놓아주기도 했다.

처음 입사했을 때 그런 나영을 보고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이런 모습은 (예전의) 군대에서나 있던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 나영에게도 단점이 있었는데 근태였다.

출근시간에 거의 매일 지각을 했고, 심지어 대표보다 늦게 나오는 날도 많았다.

눈치를 보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지만 그 행동이 고쳐지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영의 실수로 회사에 손실을 끼치게 되었다.

화가 난 대표는 오전에 회의를 소집했다.

말이 회의지 대표의 화받이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표는 안 그래도 큰 목소리로 언성을 높이며 앞으로 실수가 있는 사람은 사표 쓸 각오를 하라고 했다.

기차 화통이 정말 이런 소리일까.

표현 할 수 없이 거슬리는 그의 목소리는 화를 낼때는 정말 듣기 거북했다.

나영을 향한 잔소리를 왜 우리가 다 들어야 하는 것인가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한 달 후에 일어났다.

연봉인상이 (우린 연봉협의라는 건 없으니까) 있었는데 나영의 연봉이 파격적으로 오른 것이다.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당사자인 나영도 당황하는 것 같았다.

나도 약간 인상이 되었는데 그 금액은 최저임금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나영에 대한 대표의 특혜는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원인이 되었고 그 분위기에 나영도 불편해했다.

그러나 나는 또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나를 경악하게 했다.

그동안 모든 직원의 연봉이 해마다 인상되었는데 나만 인상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말단의 자리가 그런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다 싶어서 그동안 거쳐간 직원들의 급여 신고자료를 봤다.

솔직히 말하면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위안을 받아 계속 근무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연봉 인상이 안된 사람은 전무했고 오직 나만 그랬다.

대표는 내가 일찍 출근해서 청소도 다 해놓고 성실하다는 말을 나영에게 했다고 한다.

나영의 지각을 대 놓고 지적하기 싫으니 눈치껏 알아들으라며 내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러면 뭐 하겠는가.

연봉은 내가 아닌 나영이 인상되었는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작은 사무실은 '대표의 마음'이 회사의 내규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야 한다는 것이 회사의 원칙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생각은 점점 꼬이기 시작했고, 차별을 받았다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였다.

대표는 나에게 악덕 고용주로 캐릭터가 확고해졌다.

나이에 대한 열등감과 함께 대표에 대한 원망, 그리고 나영에 대한 시기심이 수세미처럼 머릿속을 복잡하게 휘저어놨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고, 이대로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서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다.

상담이 큰 효과는 없었지만 약을 먹으면서 널 뛰듯 혼란스러웠던 감정은 진정이 되었다.

몇 번 망설이다가 대표에게 연봉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표는 어정쩡한 이유를 댔다. 

그러면서 묻지도 않은 나영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나영은 너무 착하다며 앞으로도 계속 연봉을 올려줄 계획이라고 했다.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사세요.

지금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예요?

정말 약이 바짝 올라서 관두기라도 하길 바라는 거예요?'


그때부터 회사에 대한, 직원의 윤리에 대한 나의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직장이라는 곳은 원래 받은 월급만큼만 일을 하면 되는 곳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생각했다.

나처럼 열정을 바치면 이렇게 생색이 날것이고 그렇다고 일을 태만하게 하면 직무유기가 될 것이다.

'주인의식'이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며 사람을 망가뜨리게 되는지 몸으로 깨닫게 됐다.

그런 마음으로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기가 주인인 줄 착각 하게 되어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 같다.


나는 이제부터 내가 받은 월급만큼만 최선을 다할 것이다. 생각하고 나니 그동안 나의 직장 생활들이 마치 영화의 하이라이트처럼 지나갔다.

예전의 직장 모습들까지...

다른 사람들이 다 맞았고 내가 틀렸었다.

회사 입장을 생각한답시고 했던 말이나 행동이 얼마나 주제넘은 것이었던가.

내가 대표의 말에 리엑션을 해주었던 것은 나의 성격이 아니라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욕심일 뿐이었다.

남들보다 40분씩 먼저 나와서 청소를 하는 것 또한 내가 깨끗한 것을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대표에게 돋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대표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이유는 오직 연봉인상, 그 외에는 없었다.

내가 했던 모든 것들이 나의 연봉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비로소 나를 보게 되었다.

잘 보이기 위해서 했던 모든 것들을 다 버렸다.


첫째는 출근시간이었다.

9시 출근인데 8시 10분이나 20분이면 회사에 도착해서 청소를 했던 것을 포기했다.

이미 2년 넘게 몸이 기억하는 일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집에서 멍하게 앉아 있다 오더라도 10분 전 도착으로 시간을 맞췄다.

이것은 대표에 대한 반항이나 시위가 아니라 내 안에서 올라오는 생색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청소도 하지 않았다.

원래 이 회사는 1년에 네 번 정도 바닥 청소를 했다고 했는데 내가 와서 매일 청소를 했었다.

나는 이곳에 청소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다.

1년에 네 번을 하든 한 번을 하든 아예 안하든 수동적으로 따라서하기로 했다.


두 번째는 대표에 대한 리엑션이다.

대표가 떠드는 말에 내가 반응하는 것을 다른 직원들은 좋지 않게 바라봤었다.

뭘 그렇게 다 들어주고 있냐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나보다 더 오래 일했던 그들도 나 같은 과정을 거쳐서 현재까지 왔을텐데 말이다.

그들이 보내던 메시지를 듣기 싫어 귀를 막았었구나 내가.

그 후로는 나도 그들처럼 별 반응 없이 대표의 말들을 들어 넘겼다.

두 가지 외에는 특별히 바꿀 것은 없었다.

나의 업무는 하던대로 하면 되었으므로. 

직무를 태만하게 하면 그건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것이므로.

대표도 나의 행동이 달라진걸 눈치챘다.

어느 날 나영이 말했다.


"대표님이 묻던데요. 언니 혹시 관두려고 다른 직장 알아보고 있냐고... 만일 그런 낌새가 보이면 바로 말하라고 했어요."


이제는 스파이짓도 시키는구나...

다행히 나영이 그정도로 사리분별이 안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에게 그 말을 한 의도는 정확히 모르지만 대표가 잘해준다고 해서 나영이 대표를 좋아하진 않는것 같다.


대표에게 나는 그냥 소모품이었다.

나 같은 말단은 아무 때나 쉽게 구할 수 있어서 그러는 건가?

아니, 어쩌면 내가 그만두길 바라는 걸까?

이러다가 해고를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있는 말단 자리는 최저임금만 주어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회사에 두었던 나의 물건들도 모두 집으로 가져갔고, 업무를 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남겨 두었다.

신기하게도 그러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고, 일도 더 편하게 느껴졌다.

그동안의 무거움의 실체가 인정욕구였나 보다.

그렇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일을 하다 보니 6년이라는 시간까지 무사히 지나게 되었다.

나의 마음은 대표에 대해서는 굳게 닫혀버려서 오로지 직원으로만 대표를 대하게 됐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이런것인가 보다.

기대와 욕심, 욕구를 포기하니 뜻밖에도 당당함과 편안함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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