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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걸음씩 Dec 03. 2024

점심시간의 자유

[휴게시간에는 자유가 있어야지]

유난히 눈 뜨기 힘든 아침이 있다.

늙으면 아침잠이 없어진다는데 몇 달 후면 환갑인 나는 아직도 아침잠이 달다.

오늘은 이불 밖으로 나오기가 너무 힘들어서 늦잠을 잤다.

엊저녁 늦게 조깅을 한 것도 아침을 게으르게 만드는데 한몫한 것 같다.

출근했더니 부장도 몸이 찌뿌둥하다고 했다.


부장은 나보다 열 살 정도 다.

세명의 직원이 일하던 사무실에서 어쩌다 보니 나 혼자 남게 되었고, 부장이 새로 온 지 1년 좀 넘었다.

나의 호칭은 '언니'다.

말단에게 주어진 식적인 직급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회사 대표나 거래처에서 나를 부를 때만 사용된다.


나는 요즘 편안하다.

입사한 지 6년을 통틀어 요즘이 가장 편한 안정기다.

부장성격이 크게 모나지 않고, 나는 용기가 없어서 대표에게 요구하지 못하는 것들을 당당하게 요구하니 내가 묻어 가는것 같아 고맙다.

독불장군 같던 대표도 두 직원이 퇴사하고 부장이 오기 전까지 구인난을 겪었기에 많이 달라졌다.

그중 하나가 점심시간이다.

예전의 식사풍경은 그랬다.

대표가 앞서가면 우리 셋이 뒤를 따르며 대표가 들어가는 식당에 선택의 여지없이 들어갔다.

메뉴도 아주 싫은게 아니면 대표와 같은 걸 주문했다.

사투리가 심하고 목청까지 큰 대표의 정치이야기나 연예인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건 덤이다.

가끔 반찬이 많이 남는 경우 대표는 남은 반찬을 우리 밥그릇에 담아준다.

음식을 남기면 다음에 오면 양을 더 적게 주기 때문에 다 먹어야 한다면서 말이다.

(자기가 먹으면 되지...)

그걸 다들 싫어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식사속도가 빠른 나는 남은 반찬을 덜어주는 것이 싫어서 배불러서 더는 못 먹는다며 얼른 수저를 내려놓곤 했다.

가끔씩 대표가 점심 식사약속이 있는 날이면 우린 소풍 가는 유치원생처럼 신이 났다.


새로 온 부장은 달랐다.

반찬을 덜어주는 대표에게


"제가 먹습니다."


라며 조용하지만 완강하게 거절 했다.

민망해하던 대표의 얼굴은 지금도 선명하게 생각이 난다.


오늘 점심시간.

대표가 방에서 나오며 식사하러 가자고 했다.

부장이 우린 햄버거를 먹겠다고 했다.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대표는 그러라고 하며 혼자 밥을 먹으러 나갔다.

가끔씩 부장은 대표와 밥을 먹기 싫을 때 대표가 싫어하는 메뉴로 식사를 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곧 '우리끼리 먹겠다'는 암묵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먼저 퇴사를 한 사람들은 이렇게 달라진 회사 풍경을 보면 뭐라고 할까?

어쩌면 대표가 원래 그런 인물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인물이 되게끔 분위기를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부장은 나와 함께 밥을 먹으러 나가면서


"같이 먹기 싫어. 늙은 꼰대."


라고 말을 했다.

사실 대표가 그렇게 늙은 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사고방식이 소위 꼰대들과 견주어볼 때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대표와 가끔 이견이 생길 때가 있다.

처음에는 대표를 이해시키려 노력했으나 그가 자기가 옳다고 여겨지면 다른 사람 말을 절대 안 듣는다는 것을 안 뒤로 우리는 대표와 길게 말을 섞지 않는다.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알아도 대표는 정정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간다.

대표는 그러면서도 우리와 친해지고 싶어 하지만 그와 우리 사이에 이렇게 절대 가까워질수 없는 벽이 있다.


셋이 근무할 때와 달리 둘이 근무를 하니 우리는 찰떡 궁합이 되어 하나처럼 움직인다.

점심 메뉴를 정할 때도 그렇고, 대표에게 요구사항이 있을 때도 그렇다.

물론 나는 아주 싫지 않으면 부장의 의견을 따라주는 편이다.

내가 의견이 있을 때는 직접 대표에게 말하지 않고 부장을 납득 시키면 부장이 대표에게 건의를 하니 이럴 때는 직급이 낮은 게 편하기도 하다.


대표는 오늘 오후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절대 혼자 식당에서 밥을 못 먹는 사람'이라고  말했었는데 부장이 온 뒤로는 가끔 이렇게 혼자 먹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기니 혼밥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혼밥을 하고 나면 말수도 없어지고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을 그의 방 밖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의 기분을 위해서 억지로 함께 밥을 먹어 줄 수는 없다는 것이 부장의 생각이다.

MZ도 아닌데 MZ 같은 용기가 있다.

마음에 안 들면 퇴사하면 그만이라는 그녀의 생각을 대표가 모르는 바 아니니 또다시 구인난의 지옥으로 들어가지 않으려면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용납하는 것 같다.

그런 부장과 '하나'가 된 나에게 대표는 나잇값을 해야 한다고 자존심에 생채기를 냈지만 상한 자존심보다 그로 인해 누리는 것이 더 많으니 별로 타격감이 없다.

잘리지 않으려고 모진 소리와 차별을 눈물로 견뎠던 날들이 쌓여서 벌써 6년이 지난다.

막내면 어떤가.

모두 퇴사해야 할 나이에 버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어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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